[윤영걸의 有口有言] 또 다른 미투, 홀로서기
[윤영걸의 有口有言] 또 다른 미투, 홀로서기
  • 윤영걸 편집인
  • 호수 288
  • 승인 2018.05.17 09: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 제2의 독립선언
재정적 위험에 처한 1인 가구에서 50~60대 여성의 비중은 무척 크다. 대책이 필요하다.[사진=뉴시스]
재정적 위험에 처한 1인 가구에서 50~60대 여성의 비중은 무척 크다. 대책이 필요하다.[사진=뉴시스]

때로는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난다. 고작 그림 몇 폭이 작가가 살았던 치열한 삶의 시대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사생아로 외롭게 자란 프랑스 마리 로랑생(1883~1956년)은 신비롭고 부드러운 색과 형상을 화폭에 연출했지만, 실제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미라보 다리’의 시인 아폴리네르와의 사랑과 이별을 겪은 뒤 독일인 남작과 결혼했으나 1주일도 안 돼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국적이라는 이유로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이혼과 긴 해외 방랑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에는 파란 많았던 20세기의 지난한 사랑과 예술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비슷한 시대의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8년) 역시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외교관의 아내로, 화가로, 문필가로, 어머니로 활기찬 삶을 살았던 나혜석은 파리 체류 시절 한때의 연애사건으로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존재가 돼 떠돌다가 52세에 행려병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그녀는 비참한 후반인생을 예감한 듯 우울한 ‘자화상’을 남겨놓고 떠났다.

올해 대한민국을 강타한 ‘미투(Me Too) 운동’을 보면 아직 70년 전 나혜석이 행려병자로 죽을 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문제는 이 땅의 여성을 향해 더 가혹한 시련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한국 여성의 기대수명은 85.4세다. 남성(79.3세)보다 6년 정도 더 길다. 부부간 나이차를 서너살이라고 치면 여자들은 10년 정도 혼자 살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오래 사는 위험을 뜻하는 ‘장수 리스크’는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행복수명(건강ㆍ재정 상태 등을 고려할 때 불행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나이)’은 74.6세인데 비해 평균 기대수명은 83.1세로 8년 6개월이 행복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병을 앓는 ‘유병기간’은 16년, 일정한 수입이 없는 ‘비경제기간’은 13년으로 나타났다.

은퇴 준비의 약한 고리는 늘어나는 1인 가구다. 재정적 위험에 처한 1인 가구에서 50~60대 여성의 비중은 무척 크다. 1인 가구라고 하면 미혼 가구로 생각하기 쉽지만 처음에는 기혼이었다가 이혼이나 사별 등으로 1인 가구가 된 사례가 많다.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 몫이다. 자식에게 기대기도 쉽지 않고,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거나 헤어졌으니 그들의 노년인생은 적막강산이 될지 모른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이의 상당수는 100세까지 살 것이다. 지금의 과학기술 개발 추세로 간다면 머지않아 120세 수명이 다가올지 모를 일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이 땅의 여성들은 너무 태평하다. 특히 취업경험이 없는 여성일수록 ‘대책 없는 낙관론’을 갖고 있다. 노후를 준비할 여력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제는 여성 스스로 ‘나’ 위주로 은퇴계획을 세워야 한다. 평안하고 충만한 노후는 주체적인 삶을 준비해온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자신의 수명을 함부로 예측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실제 수명을 평균수명보다 훨씬 더 길게 내다본다면 우리네 후반 인생은 더 진지해질 게다.

여성 제2의 독립선언은 자식과 남편에서 벗어나는 경제적 자립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빠듯한 생활비를 쪼개 쓰느라 딴 주머니를 찰 엄두도 못 내고 가족을 위해 헌신해왔다. 이제 모성애에만 너무 끌려다니지 말고 자식에게 좀 더 냉정해야 한다. 아무리 피를 나눈 부모 자식이라 해도, 정해진 선을 넘지 말자는 얘기다. 인간은 어차피 독립된 개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일반 보험에 비해 가입자에게 훨씬 유리한 국민연금을 부부가 따로 가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소득이 없는 주부라도 국민연금에 임의가입이 가능하다. 장수시대에는 물가상승분이 반영되는 국민연금만큼 유리한 금융상품은 없다. 정부는 혼자 남게 될 여성을 위해 부부 중 한쪽이 사망하더라도 남은 배우자에게 지급하는 유족연금(국민연금)을 공무원연금 수준으로 개선해야 한다. 집은 반드시 부부공동소유제가 좋겠다. 남녀평등의 원리에도 부합되고 세금부담을 덜 수 있다.

모든 게 불확실하고 각박한 시대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돈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돈 없이 노후를 보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아내를 진정 사랑하는 남편이라면 배우자 스스로 재산을 형성하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빈 둥지에서 여자 혼자 살아야 할 춥고 긴 10년을 위해.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경인로 775 에이스하이테크시티 2동 17층 1704호
  • 대표전화 : 02-2285-6101
  • 팩스 : 02-2285-6102
  • 법인명 : 주식회사 더스쿠프
  • 제호 : 더스쿠프
  • 장기간행물·등록번호 : 서울 아 02110 / 서울 다 10587
  • 등록일 : 2012-05-09 / 2012-05-08
  • 발행일 : 2012-07-06
  • 발행인·대표이사 : 이남석
  • 편집인 : 윤영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중
  • Copyright © 2018 더스쿠프.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thescoop.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