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❻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발군의 해결사이자 희대의 살인마 안톤. 그는 서부 텍사스 시골 마을에서 시작해 엘 파소(El Paso)를 거쳐 멕시코까지 넘나들며 살인 행각을 벌인다. 대충 짚어봐도 살해한 사람이 13명에 이른다. 흔히 이런 류流의 살인마를 우리는 ‘사이코패스(psychopathy)’라 부른다.

자살공화국 한국에서 벌어지는 어떤 자살은 ‘사회적 타살’로 봐야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자살공화국 한국에서 벌어지는 어떤 자살은 ‘사회적 타살’로 봐야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사이코패스란 ‘psyche(영혼ㆍ정신)’와 ‘pathea(감정과 감성에 흔들림)’이라는 그리스어의 합성어다. 정신이 어떠한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기준 없이 변화무쌍한 감정에 휘둘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안톤의 살인 행각을 따라가다 보면 윤리적 기준은 분명 없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휘둘려 총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기본적인 희로애락의 감정이 거세된 듯 무척이나 담담하고 흔들림 없이 살인을 수행한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사람을 죽이는 그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 마치 완숙한 철인哲人과 같다. 그래서인지 안톤에게 단순히 ‘사이코패스’라는 이름표를 붙여주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에피쿠로스학파와 함께 그리스 철학의 양대산맥을 이뤘던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최고 경지를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상정했다. 아파테이아의 경지란 다름 아닌 온갖 정념情念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파테이아(patheiaㆍ감정)가 없는 상태다. 그러고 보면 안톤이야말로 아파테이아의 진정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스토아학파 철인들은 정념과 감정을 절제하는 수련과 깨달음을 통해 아파테이아의 경지에 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안톤은 아마도 그의 독특한 ‘운명론’을 통해 모든 정념과 감정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아파테이아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그의 운명론적 세계관은 그가 좋아하는 ‘동전 던지기’의 철학이다. 동전이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고 숱한 일을 경험하지만 그것은 동전의 의지가 아니다. 동전의 운명일 뿐이다. 동전에 앞면과 뒷면만이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삶과 죽음만이 존재할 뿐인 것이다. 운명론을 믿는다면 인간의 선과 악, 번민 모두가 무의미하고 모든 정념과 감정 또한 무의미하다 할 것이다.

감정의 동요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안톤은 아파테이아의 경지에 이른 듯 보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감정의 동요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안톤은 아파테이아의 경지에 이른 듯 보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안톤은 일말의 죄책감이나 연민의 정도 없이 눈앞의 목표물을 살해한다. 감정이 없으니 마음의 동요나 갈등도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안톤이 잡화점의 무기력한 늙은 주인에게 강요하는 ‘동전 던지기’는 순수한 운명론적 방식도 아니다. ‘결정론’으로 포장한 ‘운명론’이다.

안톤은 가게 주인에게 ‘너의 생사生死를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주겠다’며 앞면과 뒷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결코 가게 주인이 선택한 동전 던지기가 아닌 데도 마치 가게 주인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자유를 주는 것처럼 행세한다. 앞면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뒷면이 나왔다면 가게 주인은 죽었을 테고, 형식논리로만 본다면 그의 죽음은 스스로 결정한 ‘자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안톤은 그를 죽이고도 아무런 책임이 없고 일말의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하루에 30여명씩 자살하는 ‘자살 대국’이다. 분명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형식논리상 ‘자살’이겠지만 그들의 죽음이 과연 ‘자살’일까. 안톤처럼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 그들을 ‘삶’과 ‘죽음’의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것은 아닐까. 그들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는 안톤처럼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이 세상 누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자 하며, 게다가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만약 영화 속 가게 주인이 동전의 뒷면이 나와서 안톤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과연 그것을 가게 주인이 스스로 결정했으니 자살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내몰린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내몰린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어디 자살뿐이겠는가.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결코 원치 않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내몰려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린다. 학교를 그만두기도 하고, 회사를 그만두기도 한다. 그 결정을 스스로 내렸으니 그 결과도 오롯이 너의 책임이라고 단정한다. 과연 그들만의 책임일까. 사회나 학교, 회사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안톤은 모스도 죽이고, 모스의 장모도 죽이고, 모스의 아내가 숨은 친정집에 사신死神처럼 찾아들어 또 다시 ‘동전 던지기’를 마치 은전恩典인 양 제안한다. 모스의 아내는 담담하게 맞선다. “그냥 네가 결정해라. 내가 스스로 결정한 척하기 싫다.” 서로 모양새 좋게 ‘자진 사퇴’를 강요하는 사장에게 ‘네가 잘라라. 내 발로 나가지는 않겠다’고 대든다. 사장에게 대든 모스의 아내는 살아남았을까.

영화는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안톤이 그 집을 나서면서 구두 밑창을 살펴보고는 바닥에 문지른다. 이것으로 미뤄 모스의 아내도 죽임을 당했을 듯하다. ‘자퇴’를 거부하면 ‘퇴학’ 처분이 기다릴 뿐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