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높은 위스키, 권위와 과시를 걷어차다
콧대 높은 위스키, 권위와 과시를 걷어차다
  • 김미란 기자
  • 호수 291
  • 승인 2018.06.13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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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산 위스키 뜨는 이유

30년산 위스키는 한때 ‘힘 있는 자’들만 먹는 술이었다. 묵을수록 비싸고 묵을수록 가치가 높은 술, 위스키의 위상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경기침체로 소비자들의 지갑이 얇아지자 비싼 위스키는 시장에서 밀려나고, 그 자리를 연산을 표기하지 않은 값싼 위스키가 꿰찼다. 미연산 위스키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달라진 위스키 시장을 취재했다. 

가성비를 추구하는 합리적 소비 트렌드가 주류시장에도 번지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가성비를 추구하는 합리적 소비 트렌드가 주류시장에도 번지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12년, 17년, 21년, 더 나아가서는 30년…. 사람이 아닌 술(위스키)에 매겨지는 연륜이다. 사람에게 연륜이 쌓이듯 얼마나 오랫동안 원액을 숙성했느냐에 따라 술의 가치와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그 계산대로라면 위스키는 묵을수록 비싸고 묵을수록 가치가 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견고하던 위스키 계산법이 무너지고 있다. 위스키의 가치를 따지는 척도로 사용되던 ‘연산’을 표기하지 않는 제품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어서다. 

국내 위스키 업체 골든블루의 연산 미표기 위스키 ‘사피루스’가 지난 1~5월 국내 위스키 시장에서 판매 순위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시장 점유율은 15.9.%. 사피루스는 지난해에도 위스키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단일 제품이다. 이에 힘입어 골든블루는 디아지오코리아, 페르노리카코리아를 제치고 업계 1위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연산을 표기하지 않은 제품이 인기를 끌자 경쟁 업체들도 하나둘씩 연산 미표기 제품을 출시하며 트렌드를 좇고 있다. 디아지오코리아는 ‘윈저 아이스’, 페르노리카코리아는 ‘35 by 임페리얼’ 등 기존 제품 라인업에 연산을 표기하지 않은 제품을 추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산 미표기 위스키 제품들이 뜨는 이유는 뭘까.

위스키가 전성기를 누리던 2000년대. 위스키는 주로 접대용으로 쓰였다. 저렴한 가격대의 12년산보다 값나가는 17년산, 21년산이 인기를 누린 이유다. 하지만 장기화한 경기침체로 지갑이 가벼워지자 소비자들은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는 ‘가성비’가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떠올랐고, 권위적인 회식 자리보다는 술을 즐기는 음주문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에 발맞춰 권위와 과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연산’을 표기하지 않은 위스키 제품들이 속속 시장에 등장한 거다.

 

위스키 시장에서 저도수의 제품들이 인기를 끄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위스키 브랜드 톱 10(판매량 기준) 중 절반이 연산 미표기 제품이다. 그중에서도 40도 미만의 저도수 위스키가 지속적인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위스키 시장에서 40도 이상의 위스키 점유율은 2016년 73%에서 2017년 65.3%로 20% 이상 하락했다. 반면 40도 미만의 저도수 위스키는 27%에서 34.7%로 14% 성장했다.

기세 꺾인 위스키 시장 

여기에 사회적 요구도 더해졌다. ‘접대비 실명제’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등이 시행되면서 접대 문화가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고, 접대주의 대표 격인 위스키도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자 위스키 업체들의 실적도 꺾이기 시작했다. 위스키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국내 위스키 시장에서 양강 체제를 유지하던 ‘디아지오코리아(윈저)’와 ‘페르노리카코리아(임페리얼)’는 수년째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근 3년간 매출만 봐도 해마다 감소세다. 먼저 디아지오코리아를 보자. 디아지오코리아는 2014년(회계기준 2014년 7월 1일~ 2015년 6월 30일)의 매출액은 3726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시장 침체와 함께 매출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2015년엔 전년 대비 8% 감소해 3421억원, 2016년엔 3257억원으로 다시 4.8% 줄었다.

페르노리카코리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페르노리카코리아와 페르노리카임페리얼의 2014년 합산 매출액은 2594억원. 2015년엔 이보다 적은 2247억원이었고, 2016년엔 2000억원대 벽이 무너지면서 1965억원에 그쳤다. 반면 ‘연산 미표기’ ‘저도수’ 바람을 탄 골든블루는 2015년 매출액 1141억원, 2016년 1489억원, 2017년 1605억원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나는 소주 대신 양주를 마실 수 있는 재력이 있다’는 과시의 수단으로 위스키를 소비했다”면서 “하지만 점점 경기가 어려워지고, 과시보다는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게 되면서 연산 미표기 제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분석했다.

‘연산 미표기’ 세계적 트렌드

또다른 관계자는 “접대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연산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면서 “연산 미표기 위스키 시장이 성장하는 건 전세계 트렌드”라고 강조했다. 국제와인 및 주류 스피릿 리서치(IWSR)에 따르면 2016년 1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판매된 위스키 중 연산을 표기하지 않은 제품은 91.1%로 해마다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물론 연산 미표기 제품을 둘러싼 논란도 존재한다. “원액의 정확한 연산을 공개하지 않아 소비자에게 불신을 준다” “연산 제품들보다 가격을 더 내려야 한다”는 지적들이 그것이다. 연산 미표기 제품이 위축된 위스키 시장에서 나홀로 성장하고 있지만 다시 위스키의 전성기를 불러오긴 무리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음주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는 거다. 소비자들은 과시욕을 걷어내고, 합리적인 음주문화를 즐기게 됐다. ‘연산 미표기’ ‘저도수’ 제품의 성장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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