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❼

“나는 평생 보안관 일을 했다. 아버지도 보안관이었고, 나도 보안관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보안관 일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 보안관은 총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도입부, 황량한 텍사스 사막의 풍광을 배경으로 벨의 독백이 내레이션처럼 흐른다. 그는 그렇게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한다.

고도의 지능과 논리력을 지닌 사이코패스는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경우도 많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고도의 지능과 논리력을 지닌 사이코패스는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경우도 많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옛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상징을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드는 세상’으로 이상화했다. 영국 더블린에 위치한 웰링턴 장군을 기념하는 거대한 오벨리스크의 부조물은 워털루전쟁에서 노획한 병기를 녹여 만들었다고 한다. 대당對唐전쟁의 승리로 삼국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임종의 자리에서 자신의 업적을 ‘병기兵器를 녹여 농기農器를 만들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天壽를 다하도록 한 것’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웰링턴 장군이나 문무왕이나 우리 모두 총기나 병기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지만 그 꿈은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처럼 몽상에 그치곤 한다.

보안관 벨의 우울한 독백이 이어진다“얼마 전 한 사이코 살인마를 붙잡아 교수대에 세웠다. 어쩔 수 없는 사이코였다. 사람을 죽이고도 전혀 죄의식이 없고, 감옥에서 나오면 사람을 또 죽이겠다고 했다.” 한 인간을 교수대에 세운 것은 벨로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 인간은 도저히 교화 방법이 없는 ‘사이코’여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정당화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벨이 그리워하던 ‘좋았던 옛 시절’은 ‘사이코가 없는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총이 필요하게 된 것도 결국 ‘사이코’들 때문일 수 있으니까.

670년 문무왕 앞에는 설인귀薛仁貴라는 사이코가, 1815년 웰링턴 장군 앞에는 희대의 사이코인 프랑스 나폴레옹이 나타났다면, 1980년 벨 앞에는 살인마 안톤이 있었다.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Robert Hare)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다른 정신병자들과 달리 자신의 문제와 감정을 잘 숨기고, 평소에는 얌전하고 성실하며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불심검문에 걸리지도 않고 경계심을 갖지 않아 더욱 위험한 존재들이다. 텍사스에 나타난 안톤의 모습도 단정하고 성실한 외판원 정도로 보인다.

사이코패스가 두려운 이유는 평소 감정을 잘 숨기고 정상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사진=더스쿠프포토]
사이코패스가 두려운 이유는 평소 감정을 잘 숨기고 정상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사진=더스쿠프포토]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감정과 고통에는 매우 예민하나 타인의 고통과 감정에는 공감할 수 없어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안톤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도 마치 모기 한 마리를 죽여 털어버리듯 무심하다.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니 그 누구와도 정서적 유대감을 맺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영화 속 안톤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항상 혼자 다니며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한다. 심각한 총상을 입어도 약국에서 약을 훔쳐 호텔방에서 혼자 주사를 놓고 치료하고 붕대를 감는다.

모든 사이코패스가 안톤처럼 연쇄살인과 같은 끔직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이코패스가 두려운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고도의 범죄를 계획할 수 있는 지능과 논리력을 가지고 있어, 사회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톤은 교차로에서 예기치 못한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지만 이번에도 불사조처럼 완파된 자동차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기어나온다.

로버트 헤어의 ‘사이코 판별법’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모든 감정반응이 느려서 공포반응도 늦다. 안톤은 뼈가 부러져 밖으로 드러난 자신의 끔찍한 팔을 보고도 아무런 공포의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보통사람 같으면 기절하고 말 일이다. 하지만 그는 기어나와 부러진 팔을 스스로 응급처치하고 절뚝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진 안톤은 어쩌면 성공한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유명인과 정치인, 회장님들의 언행으로 연일 사회가 시끄럽다.[사진=뉴시스]
유명인과 정치인, 회장님들의 언행으로 연일 사회가 시끄럽다.[사진=뉴시스]

우리 사회에서 나름 ‘성공’했다는 유명인들과 정치인, 회장님들의 ‘사이코적’인 언행들로 연일 시끄럽다. 고도의 지능을 갖춘 사이코패스인 그들은 안톤처럼 두려움 없이 의연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아 성공한 모습으로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로버트 헤어가 개발한 ‘사이코패스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들은 말재주가 좋고 얄팍한 매력의 소유자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과도한 자존감을 지니고, 매사에 쉽게 지루해져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한다.

병적으로 거짓말에 능하고 후회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기생적인 삶을 살고 타인에게 냉담하며 매정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다.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신문 방송에 오르내리는 그들의 행각은 신통하리만큼 로버트 헤어의 사이코패스 체크리스트와 맞아떨어진다. 그들이 보여주는 ‘사이코적’ 갑질 행각은 안톤의 살인 행각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의 전성시대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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