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줄다리기 외교 필요

지금은 잔치를 할 때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를 할 때다.[사진=뉴시스]
지금은 잔치를 할 때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를 할 때다.[사진=뉴시스]

중국 드라마 ‘사마의:최후의 승자’를 보면 삼국지를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삼국시대에 가장 출중한 지략가였던 촉의 제갈량은 위를 정벌하기 위해 기산에 여섯번이나 출격했지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실패한 전문경영인으로 생애를 마감했고, 그에 맞선 사마의는 성공한 창업경영인으로 역사에 남았다.

촉의 제갈량은 위수渭水 한쪽에 진을 치고 사마의를 전투로 끌어내기 위해 별 수단을 다 쓴다. 하지만 사마의는 꼼짝도 않고 수비만 한다.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집 지키는 여인네와 무엇이 다르냐’면서 치마저고리를 선물로 주며 화를 돋우지만, 오히려 사마의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제갈량의 진지 앞에서 출사표를 읽으면서 제갈량을 분노케 한다. 사마의는 군량 문제나 제갈량의 건강 문제를 볼 때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 판단했다. 결국 병약한 제갈량은 전쟁터에서 죽고, 사마의는 싸우지도 않고 조국에 승리를 안긴다.

사마의의 기다리고 참는 전략에 힘입어 위는 삼국을 통일했다. 그는 자신을 의심하는 왕과 정적들의 견제를 물리치고 대권을 잡았다. 사마의의 전략사고는 1980년대 중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도광양회韜光養晦와 맥이 닿는다. 도광양회는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등소평 이후 중국의 대외정책을 일컫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2018년 6월 12일 미국과 북한의 정상이 싱가포르에서 역사적 회동을 했다. 핵을 가진 은둔의 독재자가 세계 최강국 지도자를 만나는 장면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시간이 미국 TV 프로그램 중 프라임타임에 속하는 저녁 9시에 열리는가 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친분이 깊은 미국 농구선수 로드먼까지 가세하는 점을 보면 리얼리티 쇼를 방불케 한다. 

북미 정상회담에 우리가 너무 들떠있지 않은지 걱정이 든다. 문재인 대통령이 싱가포르에 합류해 종전선언을 함께 하길 희망한다는 보도까지 나온 걸 보면 이렇게까지 과속할 필요가 있나 싶다. 완전한 북핵폐기 없는 종전선언은 그야말로 공염불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번 문재인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나 불편한 심사를 비친 적이 있다.

북한은 지금 군량미가 바닥난 촉의 제갈량보다 더 궁지에 몰렸다. 중국까지 경제 제재에 동참하면서 교역과 금융거래가 막혀 그야말로 살이 찢기고, 피가 마르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렇다고 북한 혼자 전쟁을 할 여력이 없다. 제갈량의 군대처럼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북한으로서는 결국 비핵화라는 카드를 들고 국면전환을 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탄핵이 거론되고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로서는 가뜩이나 조속한 협상 마무리에 대한 유혹이 크다. 트럼프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비핵화 의지가 있다 없다 이야기하며 북한의 역성을 드는데 불편한 심사를 가질 만도 하다. 한국이 나서지 않아도 미국이나 중국 등은 북한의 처지를 샅샅이 꿰고 있다.

싱가포르 해변에서 펼쳐진 여름밤 북미정상회담이 끝나고 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이 만들어 낸 각종 청구서들이 한국을 향해 손을 벌릴 것이다. 분명한 비핵화에 대한 일정조차 없이 경제제재부터 해제하면 한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 다행히 북한이 완전 비핵화를 약속한다 해도 가야 할 길은 첩첩산중이다.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본 사마의처럼 상대의 힘을 지렛대로 이용해 또 다른 상대를 누르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적을 이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이 운전대를 잡았다고 자랑하기에 앞서 원하는 방향으로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희망적 사고와 현실은 다르다. 고난의 벽을 넘어 가시밭길을 넘어야 비로소 평화가 오고 번영이 찾아온다. 로마제국이 망한 것은 교만으로 인한 내부분열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비핵화 없는 경제제재의 해제와 주한미군철수 한미군사훈련을 두고 한국 내부에서 벌어질 자중지란이다.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미국ㆍ중국ㆍ일본ㆍ러시아 네마리 코끼리에 둘러싸인 ‘작은 동물’인 한국은 코끼리들이 화내지 않게 섬세한 줄다리기 외교를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대국 중심적 생각이긴 하지만 경청할 만한 대목이다. 지금은 잔치할 때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를 할 때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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