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올드보이 ❶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15년간 영문도 모른 채 사설감옥에 갇힌 자와 그를 가둔 자 사이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원인 없는 결과’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를 뿐이다. 그래서 모두 억울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15년간 골방에 갇혀 ‘청룡반점’의 군만두만으로 연명할 만한 죄를 떠올릴 수 없는 주인공은 분노와 복수심을 키워간다.

인간의 거의 모든 죄과는 세치의 혀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인간의 거의 모든 죄과는 세치의 혀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주인공 오대수(최민식 분)가 갇힌 독방에는 감옥 생활의 좌우명 같은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피투성이가 된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는 기괴한 얼굴 그림이다. 그림에는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라는 시구가 적혀 있다. ‘괴로워해 봤자 너만 손해니 그냥 맘 편히 지내라’는 말처럼 들린다. 혹은 ‘탈출의 희망을 잃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보이기도 한다.

시구라는 게 원래 한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해석이 난해하다. 사실은 엘라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라는 우울한 여류 시인의 꽤 알려진 ‘고독(Solitude)’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윌콕스는 그의 시 ‘고독’에서 울어봐야 소용없는 이유를 밝힌다.

“세상이란 기쁨과 즐거움은 워낙 없는 곳이라 네가 웃으면 모두 신기해서 너에게 몰려오지만, 반대로 세상은 원래 슬픔으로 가득 찬 곳이라 네가 울어봐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울고 있는 것은 당연할 뿐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

아마도 오대수는 윌콕스의 시를 ‘포기하지 말고 탈출하라’는 메시지로 오독했는지 모르겠다. 8평짜리 좁은 독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군만두 먹기와 TV 시청밖에 없는 그는 TV로 권투를 독학한다. 두 주먹이 모두 헤지고 벽이 피범벅 되도록 벽치기로 무술을 익힌다. 부모나 스승의 복수를 위해 극한 수련을 이겨내는 중국 무협 영화를 닮았다.

오대수는 15년간 영문도 모른 채 사설감옥에 갇혀 군만두로 연명을 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오대수는 15년간 영문도 모른 채 사설감옥에 갇혀 군만두로 연명을 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자신의 이름 ‘오대수’에 ‘오늘만 대강 수습하며 산다’는 깊은 철학이 담겼다며 술 좋아하던 그다. 술에 취해 파출소에서 웃통 벗고 난장판 벌이며 대강 살던 오대수는 TV를 통해 무술도 익히고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한다. 인생의 확고한 목표도 생긴다. ‘슬기로운 감방생활’의 절정판이다. 껄렁했던 오대수는 15년간의 ‘슬기로운 감방생활’ 덕에 극강 살인 청부업자 키아누 리브스처럼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대단히 정제된 모습으로 서울 거리를 향한다.

그러나 오대수에게 15년간 독방 수감의 형벌을 내린 이진우(유지태 분)는 그것으로도 오대수에 대한 응징을 완료한 것은 아니었다. 15년의 수감은 본격적인 응징을 준비하기 위한 숙성 기간에 불과했다. 오대수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그토록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된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된다. 혀를 잘못 놀린 죄였다.

남의 일에 대해 무심코 재미 삼아 놀린 혀가 예리한 비수로 변해 당사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살피지 않았다. 사람은 죽어 염라대왕 앞에 엎드려 염라대왕이 꼼꼼히 기록한 죄명세서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죄과를 깨닫는다. 오대수는 이우진의 발 아래 엎드려 ‘자신은 개보다 못하다’며 이우진의 발을 핥고, 함부로 놀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르는 엽기적인 반성을 한다.

염라대왕은 명부冥府의 다섯 번째 대왕으로 죄인의 혀를 집게로 뽑는 발설拔舌 지옥을 관장한다. 최후의 심판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의 주요 업무가 ‘혀를 뽑는 일’인 것으로 미뤄 보건대 인간의 거의 모든 죄과는 세치의 혀에서 나오는 모양이다.

함부로 놀린 세치 혀가 누군가에게는 비수가 돼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사진=뉴시스]
함부로 놀린 세치 혀가 누군가에게는 비수가 돼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사진=뉴시스]

모 재벌기업 3세가 세치의 혀를 거칠게 놀려 재벌 일가 전체가 검찰ㆍ국세청이라는 염라대왕 앞에 엎드려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게 된 모양이다. 아마 이들도 오대수처럼 생각 없이 놀린 세치의 혀가 상대에게 예리한 비수가 돼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헤아리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던진 물컵처럼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오대수는 염라대왕 앞에서 염라대왕이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미리 스스로 혀를 잘라버림으로써 가까스로 이진우라는 염라대왕의 사면을 받았다. 검찰과 국세청의 사면을 받기 위해 이들은 무엇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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