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풍경 조성태 사장

조성태 사장은 ‘미소’가 아름답다. 활짝 웃을 땐 눈이 감긴다. 진심이 담긴 그의 미소는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킨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성태 사장은 ‘미소’가 아름답다. 활짝 웃을 땐 눈이 감긴다. 진심이 담긴 그의 미소는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킨다. [사진=오상민 작가]

‘후원을 위한 미덕美德’은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일부 높으신 양반들처럼, 약간의 위선만 떨면 얼마든지 미덕을 뽐낼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을 내건 미덕’은 함의含意가 다르다. 누군가를 위해 내 삶과 욕구를 포기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건 헌신이다.  

조성태(46) 카페풍경 사장. 월 매출 1억원이 넘는 ‘카페 체인’을 미련없이 팔았다. 그 돈으로 ‘발달장애인과 함께하는 카페’를 차렸다. 많은 이들이 “왜 실속도 없는 길을 스스로 걷느냐”며 핀잔을 주곤 하지만 그는 꿋꿋하다. “꿈이 없다는 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사회적 약자도 꿈을 꿀 자격이 충분합니다.” 더스쿠프(The SCOOP)와 천막사진관이 조성태 사장을 만났다. 11번째 주인공이다. 

#1장. 3년 만의 만남  

2014년 6월 대구 동성로. 습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 성가시던 날이었다. 뗑그렁~. 카페 문 위에 달린 풍경風磬이 울렸다. 관성처럼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카페 사장(조성태)은 순간 멈칫했다.

 
“어쩐 일로 ….” 사장 앞엔 50대 초반의 중년남성(사회복지법인 대표)이 서있었다. 두 사람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3년 만이었다. 2011년 사장과 중년남성은 함께 꿈을 키웠고, 함께 꿈을 잃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한쪽은 실망감, 다른 한쪽은 미안함을 안고 살았다.  카페 한편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중년남성이 침묵을 깼다. “한번 더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짧은 부탁, 중년남성은 말보단 표정으로 더 많은 속내를 전달하고 있었다.  

사장은 덤덤하게 답했다. “그때 왜 그렇게 됐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입니다.” 뗑그렁~ 뗑그렁~. 풍경이 시끄럽게 울렸다. 손님이 들어왔다는 신호. 사장은 관성처럼 몸을 돌리지 않았다. 차가운 이성이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성태 사장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카페를 꿈꾼다. 조 사장이 에스프레소 머신의 스팀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성태 사장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카페를 꿈꾼다. 조 사장이 에스프레소 머신의 스팀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 2장. 2011년 뼈아픈 실패   
  
2011년 여름, 비가 쏟아지던 날. 중년남성은 카페 사장을 찾아갔다. 생각의 여유와 폭이 깊은 사람, 도울 줄도 베풀 줄도 아는 사람 …. ‘발달장애인 카페’를 꿈꾸던 중년남성에게 사장은 꼭 만나야 할 이였다. 첫 만남은 기대한 대로였다. 사장은 “흔쾌히 돕겠다. 2~3개월 컨설팅을 해주겠다”며 환한 미소를 보냈다.  

중년남성이 준비하던 카페는 마을 공동체 안에 있었다. 사장에겐 중증 발달장애인 4명이 맡겨졌다. 약간 당황했지만 사장은 진심을 다했다. 메뉴를 손수 개발했고, 마을 주민이 좋아할 만한 음료를 준비했다. 발달장애인들에겐 ‘할 수 있는 일’을 맡겼다. 밀가루를 반죽하는 일, 재료 써는 일, 홀 서빙 등이었다. 

사장의 생각은 분명했다. 누가 보더라도 이곳은 ‘고객을 위한 공간’이어야 했다. 맛이든 가격이든 모자람이 없어야 했다. ‘그냥 와줘야지’라는 동정, ‘그럼 그렇지’라는 경멸이 흘러서도 안 됐다.  반응은 빨리 왔다. 99㎡(약 30평) 카페에서 기대 이상의 매출이 발생했다.

대구각산혁신도시에 있는 카페풍경에는 발달장애인 희수가 근무한다. 조 사장은 모르면 알려주고 실수하면 기다려준다. 희수는 점점 행복해지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대구각산혁신도시에 있는 카페풍경에는 발달장애인 희수가 근무한다. 조 사장은 모르면 알려주고 실수하면 기다려준다. 희수는 점점 행복해지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런데, 그럴수록 앞길이 험해졌다. 속도를 조금만 내면 “아이들 그거 못 할텐데…”라는 동정 같은 의심이 쏟아졌다. 발달장애인들은 벽을 만들지 않았는데, 정작 사회가 높은 벽을 친 듯했다.  

‘발달장애인 카페’ 컨설팅을 맡은 지 석달 후, 사장은 약속대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우려는 현실이 됐다. 카페는 특색을 잃었다. 메뉴는 단순해졌고, 고객의 발걸음은 뜸해졌다. 

더 심각한 건 생업까지 미룬 채 일을 도운 사장을 향한 멸시蔑視였다. ‘밖에서 온 사람이 뭘 안다고…’라는 이방인 취급은 그나마 참을 만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돈 벌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은 사장의 심장을 마구 찔러댔다. 

진심은 왜곡됐고, 사장은 상처를 입었다. 중년남성은 말 못할 미안함에 사로잡혔다. 그때 그 상처는 두 사람이 3년 만에 만난 2014년 그날까지 관통했다. 마음의 아픔은 질겼다. 

# 3장. 2014년 작은 성공 

다시 2014년 그날. 사장의 말엔 날이 실려 있었다. “또 만들자고요? 안 합니다.” 중년남성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한 번 더 해보자’는 묵시적인 부탁이었다. 1시간여, 사장은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신적인 삶을 살아온 중년남성의 진심을 외면할 수 없었다.  

조성태 사장은 헌신과 배려에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성태 사장은 헌신과 배려에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해 가을, 대구로 막 이전한 A기관의 로비에 ‘발달장애인 카페’ 2호점이 차려졌다. 중년남성은 발달장애인 4명을 뽑았다. 이번에도 중증이었지만 사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모진 경험은 그에게 내성耐性을 선물했다.  보름 동안 발달장애인들의 행동을 찬찬히 살폈다. 한 아이는 숫자를 기막히게 읽었다. 다른 아이는 한가지 동작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또 다른 아이는 순서를 잊는 법이 없었고, 나머지 한 아이는 ‘자기만의 세상’을 만끽했다.

사장은 그들에게 ‘쟁이’라는 꼬리말을 남몰래 붙였다. ‘발달장애인의 숨은 능력을 빛내주리라’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도전은 그때부터였다. ‘숫자쟁이’에겐 생과일의 무게를 다는 저울을 맡겼다. ‘동작쟁이’에겐 일정한 압력으로 커피를 누르는 일을 시켰다. ‘순서쟁이’에겐 에스프레소에 물이나 우유를 넣고 뚜껑을 닫는 일, ‘혼자쟁이’에겐 홀 청소를 맡겼다.

조성태 사장은 발달장애인들의 특징을 유심히 살핀다. 개인마다 숨은 장점을 갖고 있어서다. 조 사장은 “기다릴 줄 알아야 발달장애인과 함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성태 사장은 발달장애인들의 특징을 유심히 살핀다. 개인마다 숨은 장점을 갖고 있어서다. 조 사장은 “기다릴 줄 알아야 발달장애인과 함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개개인의 특징에 맞춰 일을 나눠주자 빈틈이 사라졌다. 일정한 압력으로 눌러 추출한 커피는 품격을 뽐냈다. 생과일 무게를 1g까지 맞춘 음료는 균일한 맛을 냈다. 홀은 언제나 반짝반짝 빛났고, 커피 등 음료가 고객에게 전달되는 ‘루틴’은 치밀했다.

‘발달장애인 카페’ 2호점이 짜임새를 갖추자, 사장은 고객을 위한 메뉴를 만들었다. 고객이 김밥을 원하면 한밤에도 김밥을 말았다. 신선한 샌드위치를 부탁하면 동네시장을 돌면서 풋풋한 야채를 공수했다. 단골이 생겼고, 매출이 일어났다. 성공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2017년초. ‘발달장애인 카페’ 2호점의 뿌리는 더 튼튼해졌다. ‘발달장애인과 함께한다’는 진심과 ‘고객만을 위한다’는 헌신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 무렵, 사장은 그곳을 미련없이 떠났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마음의 상처를 씻어냈으니, 그것만으로 족했다. 다른 목표도 있었다. “발달장애인 커피숍을 ‘모델화’해 보겠다”는 거였다. 그는 다시 가시밭길 한복판에 섰다. 2017년 겨울이었다. 

# 4장. 인생을 내건 미덕   

“못 하는 걸 하라고 강요하는 건 학대다. 그렇다고 ‘못 하니까 이것만 하라’고 단정 해선 안 된다. 이는 또 다른 모습의 학대다(조성태 카페풍경 사장).”  

월 매출은 1억원이 훌쩍 넘었다. 지점은 2곳이나 있었다. 대구 동성로에 있던 ‘카페풍경’은 예쁘고 실적 좋은 카페였다. 2017년 1월, ‘발달장애인 카페’를 컨설팅하고 돌아온 조성태 사장은 돌연 이 카페를 점주들에게 넘겼다.

 그 돈으로 대구각산혁신도시에 같은 이름(카페풍경)의 작은 카페(108㎡‧약 33평)를 만들었다. ‘발달장애인과 함께하는 카페’였다.

조 사장의 아내 손일명씨는 손맛이 일품이다. 손씨가 연어덮밥을 만들 생연어를 다듬고 있다(위). 얇은 소고기로 밥을 싸서 구운 소고기말이는 카페풍경의 대표 메뉴다(아래).[사진=오상민 작가]
조 사장의 아내 손일명씨는 손맛이 일품이다. 손씨가 연어덮밥을 만들 생연어를 다듬고 있다(위). 얇은 소고기로 밥을 싸서 구운 소고기말이는 카페풍경의 대표 메뉴다(아래).[사진=오상민 작가]

이 아담한 곳에선 조성태 사장, 그의 부인 손일명씨, 경력단절녀 2명(파트타임), 발달장애인 희수가 꿈을 키우고 있다. 조 사장이 ‘발달장애인과 함께하는 카페’를 만든 건 반성과 깨침 때문이었다.

“2011년 발달장애인을 처음 봤을 때 좀 놀랐어요. 장애인 복지를 전공한 저 스스로 ‘이렇게 몰라도 되나’ 싶을 정도였죠. 일반인과 발달장애인이 공존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어요.”  

누군가는 무모한 도전이라 꼬집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간신히 털어냈는데, 왜 그러냐는 핀잔도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주저없이 인생을 내걸었다. 딱히 조건을 걸지도 않았다. 실패를 대비해 뒤를 봐둔 것도 아니었다. 인생을 내건 미덕美德, 그건 헌신이었다. 

조 사장은 어쩌면 ‘실속 없는 길’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피땀 흘려 닦아놓은 카페를 미련 없이 팔아버렸으니, 세상의 속물들은 그를 ‘바보’라 부를 거다. 하지만 그에겐 약간의 위선도, 욕심도 없다. ‘발달장애인 카페’, 그 자체가 진심이다.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발달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어요. 사회적 약자도 꿈을 꿀 자격이 있거든요. 꿈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가슴 아픈 일이에요. 제가 그랬거든요.” 그의 밝은 얼굴에 어둠살이 앉았다. 험상궂은 덩치들 틈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꼬마가 보였다. 1982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조성태 사장은 긍정의 아이콘이다. 주방에서든 홀에서든 웃음을 잃지 않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성태 사장은 긍정의 아이콘이다. 주방에서든 홀에서든 웃음을 잃지 않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 5장. 희생을 먼저 깨우치다

그해 겨울. 부산 꼬마 성태(삼형제 중 둘째)는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삼형제 아빠 사업이 어려워졌대. 망하려나봐.” 빈 소문이 아니었다. 얼마 후 성태의 집엔 빨간딱지가 붙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은 험한 말을 쏟아내며 아버지를 찾았다. 

성태는 공포를 느꼈고,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한숨만 내쉬던 엄마는 어디론가 떠났다. 아빠는 느닷없이 계모를 불러들였다.  엄마를 다시 만난 건 3년 후 대구에서였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던 엄마였지만 3년 전 엄마가 아니었다. 너무나 핼쑥했다. 집도, 세간도 형편없었다. 생계를 위해 선택했다는 식당일은 ‘고됨의 연속’이었다. 

설움이 가슴을 때렸지만 꼬마 성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럴수록 엄마, 형, 동생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강박強迫이 세졌다. 숙명宿命이란 말의 뜻을 모를 나이에 성태는 ‘운명의 야속함’을 먼저 알아버렸다.  

조성태 사장은 어릴 때 꿈을 잃었다. 그래서 꿈이 없는 삶이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안다. 그가 발달장애인에게 꿈을 주는 일에 인생을 내던진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성태 사장은 어릴 때 꿈을 잃었다. 그래서 꿈이 없는 삶이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안다. 그가 발달장애인에게 꿈을 주는 일에 인생을 내던진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1989년 중학교를 졸업한 성태는 공고를 택했다. 남부럽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장학금이 먼저였고, 하루라도 빨리 기술을 배워 ‘한 입’이라도 줄여야 했다. 

가세家勢는 나아지지 않았다. 손님이 부쩍 줄어든 엄마 식당은 문을 닫았다. 생존을 위해 엄마는 시장에 좌판을 깔고 멍게‧홍합을 팔았다.  고등학생이 된 성태도 밥 대신 괴로움을 씹었다. 점심시간이면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버스 토큰이 없어 학교(신안동)부터 집(비산동)까지 걸어 다녔다.

잰걸음으로도 1시간30분은 족히 걸리는 길. 그 먼 길은 성태에게 고난이자 절망이었다. 내색할 수도 없었다. 엄마 앞에서 투정은 스스로 정한 ‘금기禁忌’였다. 성태는 꿈을 잃어갔다.  

# 6장. “당신은 소중합니다”  

1990년 성태는 고2가 됐다. 나아진 건 없었다. 그해 여름, 그날도 참 힘겨웠다. 수돗물로 점심을 때운 탓이었다. 방과 후,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17살 성태에게 세상은 여전히 ‘매정한 곳’이었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설교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고, 그중 한 구절이 성태의 귀에 꽂혔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내용이었다. 

언젠가부터 ‘소중’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사치였다. 엄마, 형, 동생을 위해 버려야 할 쓸모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그랬을까. “당신은 소중합니다”는 말을 들은 성태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주체할 수 없는 설움과 울분이 가슴을 울린 탓이었다. 성태는 혼잣말을 되뇌었다. “행복을 누릴 자격은 누구에게든 있다. 나도 소중하다.”

조성태 사장은 삼남매의 아빠다. 막내딸 아현이의 작품이 카페풍경 냉장고에 붙어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성태 사장은 삼남매의 아빠다. 막내딸 아현이의 작품이 카페풍경 냉장고에 붙어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성태는 걸음을 멈췄다. 하늘을 보고 싶었다. 별의 ‘반짝거림’이 못마땅해 땅만 보고 걷곤 했는데, 이날만은 별을 찾고 싶었다. 그건 어릴 때 버렸던 꿈이었다. 성태는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꿈을 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몇년만에 웃음을 되찾았다. 꿈을 찾은 덕분인지 희생도, 양보도 힘겹지 않았다. 17살 성태는 꿈 많고 인정 넘치는 청년으로 돌아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92년, LG전자 창원공장에 들어갔다. 그는 긍정의 아이콘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렸다. 고된 일도 척척 해냈다. 평균 10여년 걸리는 작업반장에 7년 만에 오를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월급이 그리 많은 건 아니었지만 엄마에게 생활비를 줄 수 있어 행복했다. 때마침 형도 취업에 성공해 살림살이가 조금 폈다.

수십년 만에 찾아온 행복, 성태는 기뻐할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성태는 갑작스럽게 사표를 던졌다. 17살 때 가슴 한편에 묻어둔 꿈을 좇기 위해서였다. 

더치커피 추출기에 카네이션이 올려져있다. 조성태 사장은 “스승의 날에 받은 작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의 환한 미소가 물에 스민다. [사진=오상민 작가]
더치커피 추출기에 카네이션이 올려져있다. 조성태 사장은 “스승의 날에 받은 작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의 환한 미소가 물에 스민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 사장이 더치커피를 내리기 위해 원두를 골라내면서 한마디 던졌다. “세심하게 살펴 원두를 골라내면 등급이 낮아도 맛이 괜찮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진=오상민 작가]
조 사장이 더치커피를 내리기 위해 원두를 골라내면서 한마디 던졌다. “세심하게 살펴 원두를 골라내면 등급이 낮아도 맛이 괜찮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진=오상민 작가]

# 7장. 꿈은 이뤄진다  

“17살 때 별을 보면서 ‘약자에게 희망을 주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종교적 의미의 선교사는 아니에요. 고된 삶에 치여 꿈을 잃고 사는 사람들을 돕는 헬퍼(Helper)를 꿈꿨죠. 제가 사회복지학과에 도전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어요.”  

사표를 던진 성태는 수능 공부에 매달렸다. 중학교 때 성적이 괜찮았다지만 옛일이었다. 수학도, 영어도 제대로 배운 적 없었다. 시간도 많지 않았다. 형편상 1년 이상 수능에 매달리긴 어려웠다. 

엄마도, 형도 뜯어말린 도전. 절박했던 성태는 혼신의 힘을 쏟았고, 세상은 그에게 기적을 선물했다. 합격이었다(경북대 사회복지학과 99학번).

성태는 장애인 복지학을 좋아했다. 시각·청각·지체 장애인을 때마다 만나 소통했다. 장애인의 고난을 함께 깨쳤고, 사회의 편견을 함께 떼치려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국립대 학비도 그에겐 부담스러웠다. 아침엔 신문과 우유를 돌렸다. 밤엔 택시를 몰거나 대리운전을 했다. 술 취한 아저씨에게 따귀를 맞는 건 예사였다. 인사불성 청년에게 얻어맞은 일도 숱했다.  

‘커피의 눈물’이라 불리는 더치커피는 장시간에 걸쳐 우려낸 커피다. 햇살을 받은 커피 방울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사진=오상민 작가]
‘커피의 눈물’이라 불리는 더치커피는 장시간에 걸쳐 우려낸 커피다. 햇살을 받은 커피 방울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때였다. 2001년 나이트클럽에서 대리운전 알바를 하던 그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대구 동성로에 있는 카페를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마침 여자친구(아내 손일명씨)가 알바를 하던 곳이었다. 

고민스러웠다. 매장(42㎡·약 13평)이 워낙 작아서 콘셉트를 잘 잡아야 수익을 거둘 수 있을 듯했다. ‘그곳에 오픈만 하면 족족 망해 나갔다’는 소문도 찜찜했다. “사회복지사의 길을 걸으려면 안정적인 수익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언제까지 대리운전을 할 수도 없었죠.” 

성태는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2000여만원을 탈탈 털어 카페를 인수했다. 이름은 ‘카페풍경’이라 지었다. 예쁜 카페를 만들었다. 1990년대 경양식집 콘셉트를 엮었고, 맛깔스러운 신메뉴 ‘소고기말이’를 내놨다.  잔잔한 바람이 일었다. 소고기말이를 먹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장사진이 펼쳐지는 날이 늘어났다.

매출도 몰라보게 커졌다. 2004년엔 2호점(딜), 2008년엔 3호점(토브)을 열었다. 2011년 직원은 30명을 훌쩍 넘어섰고, 연 1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그렇다고 헬퍼 역할을 게을리한 것도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창업 컨설팅은 본업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사회적기업을 위한 컨설팅만큼은 뒤로 미루지 않았다. 후원사업을 위해서라면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때론 사기를 당하고, 때론 큰 손실을 봤지만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2011년 ‘발달장애인 카페’를 준비하던 중년남성의 귀에 ‘조성태’라는 이름이 새겨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운명이었다.  

아내 손일명씨는 조 사장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반자다. [사진=오상민 작가]
아내 손일명씨는 조 사장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반자다. [사진=오상민 작가]

#8장. 이유 없는 동정과 금기

2011년, 중년남성과 함께 ‘발달장애인 카페’ 1호점을 준비하기 시작한 첫날. 발달장애인을 만난 조 사장은 두번 놀랐다. 겉으론 너무 멀쩡해서, 속으론 너무 심각해서였다. 장애인 복지를 전공했다고 자부했지만 발달장애인의 삶엔 무지했다.  

“그땐 몹시 아프고 상처가 깊었지만 돌이켜보면, 2011년 실패가 많은 교훈을 줬어요. 발달장애인은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 함께 기다리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었죠.” 

뼈아픈 실패(2011년)와 작은 성공(2014년)을 경험한 조 사장은 2017년 ‘발달장애인 카페(카페풍경)’를 만들었다. 가치가 뚜렷한 카페였다. “이곳은 누군가를 돕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고객을 위한 공간이다. 이유 없는 동정과 후원은 안 된다. 발달장애인은 장애인이 아니다. 구성원이다. 인격체다.”  

카페풍경에서 근무한 지 1년이 훌쩍 흐른 지금. 희수는 메뉴판을 건네고, 주문을 받으며, 서빙을 하고, 계산을 한다. 손님이 많은 시간엔 긴장하고, 손님이 빠지면 여유를 찾는다. 발달장애인 희수에게 찾아온 놀라운 변화, 기다림의 선물이었다.  

희수는 할 수 있는 일이 늘었다. 손님이 오면 인사를 하고 메뉴판을 건넨다. 주문을 받고 서빙에 계산까지 척척이다. 1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희수는 할 수 있는 일이 늘었다. 손님이 오면 인사를 하고 메뉴판을 건넨다. 주문을 받고 서빙에 계산까지 척척이다. 1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 사장은 잘한 건 칭찬하고 잘못한 건 바로 잡아준다. 발달장애인과 호흡을 맞추려면 기다려야 한다. 무조건적인 동정과 배려는 답이 아니다.[사진=오상민 작가]
조 사장은 잘한 건 칭찬하고 잘못한 건 바로 잡아준다. 발달장애인과 호흡을 맞추려면 기다려야 한다. 무조건적인 동정과 배려는 답이 아니다.[사진=오상민 작가]

# 9장.  “정말 고맙습니다”

조 사장은 요즘 카페풍경의 안정화 작업에 골몰하고 있다. 누가 카페를 운영하든 적은 비용으로 알찬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발달장애인 카페’라는 가치를 공감하는 이들에게 카페풍경의 모델을 나눠주기 위해서다. 가치만 공유한다면, 컨설팅이든 자문이든 무료다.  

“발달장애인을 고용한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정부나 복지단체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불가능하구요. 중요한 건 ‘발달장애인과 함께할 수 있다’는 공감대입니다. 공감대만 있으면 아름다운 생태계를 만들 수 있어요.”   

그는 말에 힘을 실었다. “예를 들어볼게요. 저와 뜻이 같은 사람에겐 ‘카페풍경의 모델’을 아낌없이 줄 겁니다. 그런 사람이 100명 있으면 ‘발달장애인 카페’가 100개 생긴다는 겁니다. 꿈이 아닙니다. 현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점심영업이 끝나자 희수가 홀을 정리하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한다. 희수는 그렇게 성장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점심영업이 끝나자 희수가 홀을 정리하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한다. 희수는 그렇게 성장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얼마 전 희수 어머니가 조 사장을 찾아왔다. 조용히 식사를 마친 그는 조 사장에게 짧은 두마디를 남겼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 사장은 뭉클함을 애써 누르면서 답했다. “희수는 카페풍경의 중요한 직원입니다.”  눈물을 쏟아내던 엄마가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조 사장이 빙긋이 웃었다. 발달장애인 희수가 따라 웃었다. 그곳엔 편견도, 차별도 없었다.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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