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경협과 비핵화 이끌려면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처럼 경제가 먼저 물꼬를 터야 한다. 경제는 북한 변화를 이끌 남한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사진=뉴시스]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처럼 경제가 먼저 물꼬를 터야 한다. 경제는 북한 변화를 이끌 남한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사진=뉴시스]

#장면1=42년 전 이맘 때 일이다. 통합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미국 무하마드 알리와 프로레슬링 선수인 일본 안토니오 이노키가 1976년 6월 26일 도쿄에서 세기의 대결을 벌였다. 경기장 로열석은 300만원을 호가했고, 위성생중계로 14억명이 대결을 시청했다.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이노키는 링 위에 누워만 있었으며 알리는 외곽만 빙빙 돌다가 싱겁게 끝났다. 이종격투기의 효시가 된 상징적인 대결이지만 프로권투와 프로레슬링에 대한 팬들의 시선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장면2=20년 전인 1998년 6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소떼 방북’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외환위기로 온 국민이 고통 받을 당시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보내진 1001마리의 소떼는 희망의 씨앗이었다. ‘소떼 방북’은 금강산 관광사업(1998년 11월)과 개성공단(2003년 6월)이라는 결실을 맺게 했다. 

역사적인 회동으로 큰 기대를 모았던 6월 12일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보고 40여년 전 알리와 이노키의 경기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난 25년 동안 한반도를 무겁게 짓눌러온 핵 공포를 걷어내 줄 것으로 믿었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배신감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공동성명은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담았던 2005년 9ㆍ19 공동성명보다 오히려 후퇴했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둘러싼 그레이트 게임이 ‘자발적 비핵화’라는 미명 아래 용두사미로 끝날까 걱정이다.

국가간 협상은 상대방을 믿을 만큼만 믿어야 하는데 북한은 과연 신뢰할 만큼 변했을까 의문이다. 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에 나서면서 ‘사상개방’부터 했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 시대부터 체제유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변화를 완강히 거부해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진짜 변하려면 김일성ㆍ김정일 시대의 교시를 일부라도 부정하는 결단이 필요한데, 이는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북한의 선의善意와 호혜주의에 의존한 지금의 해결방안은 언제든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섣불리 실망할 일은 아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처럼 경제가 먼저 물꼬를 터야 한다. 지금 북한은 장마당(시장)이 480개, 일반가정이 시장에서 구입하는 물건 비중이 70% 이상이라고 한다. 2014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에서 공식무역이 차지하는 비율이 52%지만 밀수까지 감안하면 북한 무역의존도는 세계 평균인 60%대를 넘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무역적자가 16억 달러여서 경제제재가 완화되지 않으면 2년 안에 국가부도사태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김병연 서울대 교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중단을 선언하자 허둥지둥 친서를 보낸 건 북한 정권의 목을 조여 오는 경제난 때문이다. 북한은 지금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인 무역과 시장이 흔들리고 서까래마저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경제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북한 변화를 이끌 남한의 가장 강력한 무기요, 남과 북이 평화공존과 번영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북한 경제지원은 독재정권을 살리는 게 아니라 핵을 다시 손에 쥐면 북한 정권이 큰 피해를 보는 구조를 만들면 된다. 무엇보다 국제사회에 보유 핵과 미사일을 신고 폐기하는 게 북한에 이익이 되는 유인체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 핵심 제재는 비핵화 완료 이전에는 해제하지 않되, 그 외에는 덜 중요한 부문부터 점진적으로 해제 가능하다. 철도나 광산 공동개발 등 대규모 경협은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참여하되, 만일 북한이 핵을 다시 개발한다면 한푼도 얻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북한과 경제협력을 하면서 북한 정권에 돈을 대는 것은 극력으로 막아야 한다. 예를 들면 김정은이 원한다는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의 카지노는 대단히 위험한 투자가 될 수 있다. 김정은 개인 호주머니나 국영기업에 돈이 들어가는 구조가 되면 북한은 개혁 개방에 나설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이보다는 북한의 노동력을 교육하고 사기업 등의 제도 변화를 이끌어 낸 뒤 돈과 기술을 본격 투입하는 게 순서다.

남북경협과 비핵화는 굴러가는 수레바퀴와 같다. 어느 한쪽이 앞서 달리면 수레가 뒤집어질 수 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해야 비핵화와 경제협력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20년 전 ‘소떼 방북’이라는 창의적인 발상을 한 정주영 명예회장이 새삼 그리워진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