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올드보이 ❷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하루아침에 감옥에 갇혀 15년간 지낸 자와 그를 가둔 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죄를 몰랐던 주인공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발을 개처럼 핥고 제 손으로 혀를 잘라내는 엽기적 참회를 하고 복수를 끝낸 피해자는 자살한다. 복수는 공멸일 뿐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복수의 결말은 공멸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복수의 결말은 공멸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오대수(최민식)를 15년간 군만두만 먹이며 감금한 이우진(유지태)은 둘 사이의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설정하지만, 정작 가해자로 지목된 오대수는 자신이 가해자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받는 응징은 가해자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게 되고 응징자를 가해자로 여겨 복수에 나서게 되는 출구 없는 미로에 빠지게 만든다.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게 된다. 띠 모양의 종이를 한번 꼬아서 끝과 끝을 연결해버리면 띠는 면이 한개밖에 없다. 앞면과 뒷면의 구별이 없고 좌우의 방향도 사라진다. 인지의 부정합으로 인해 한 번 ‘꼬여버린’ 관계는 불가해不可解한 ‘뫼비우스의 띠(Mobius trip)’가 되어버린다. 긴 종이 띠는 분명 앞뒤와 좌우를 분간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한 번 꼬아 양 끝을 붙여버리면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다.

이우진의 46층 펜트하우스 설정은 마치 까마득히 높은 저승의 명부冥府와 같다. 당연히 명부의 주인 염라대왕은 펜트하우스 주인 이우진이다. 이우진은 명부에 끌려온 오대수에게 그의 죄과를 알려준다. 혀를 잘못 놀려 이우진의 누이를 자살하게 만든 죄다. 오대수는 “그런 일이 있었냐? 나는 몰랐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여전히 당당하다. 수많은 재판정이나 청문회에서 볼 수 있는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다.

이우진이 예상했다는 듯 조롱한다. “기억나지 않겠지. 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야. 남의 일이니까 기억하지 못할 뿐이야.” 자신의 죄와 잘못을 꼼꼼히 기록하고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살기는 쉽지 않다. 남의 팔이 하나 잘려나가는 고통이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의 고통만 못하다. 남의 고통은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고 나의 고통만 느끼게 되면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한다. 오대수는 한 여학생의 부적절한 밀애 장면을 훔쳐보고 떠벌림으로써 당사자인 여학생이 받았을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다. 분명 가해자임에도 그 죄 때문에 받게 되는 자신의 고통이 억울해 오히려 복수심에 불타는 피해자가 된다.

오대수는 자신의 한마디가 한 여학생을 자살로 몰았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오대수는 자신의 한마디가 한 여학생을 자살로 몰았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누구나 자신이 저지른 죄는 ‘사소하고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치부하고, 기록하지 않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남에게 받은 고통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해도 ‘있을 수 없는 일’로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기록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오대수는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엿본 여학생의 부적절한 밀애 장면을 떠벌린 ‘죄’ 쯤은 ‘사소하고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치부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피해자인 이우진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대수의 저주받을 세치 혀가 자신의 누이이자 연인인 한 여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억울해 마지않는 오대수에게 이우진이 타이르듯 말한다: “모래알이든 바윗돌이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야.” 1명을 죽이든 10명을 죽이든 살인죄는 같은 살인죄일 뿐이다. 죄의 경중輕重과 크고 작음을 논하는 일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다. 마치 ‘나비 효과’처럼 내가 무심코 저지르는 사소한 불찰 하나가 상대에게는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산둥반도의 작은 나비의 날갯짓 하나가 플로리다 해안에 태풍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엔 죄를 인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는 가해자들이 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우리 사회엔 죄를 인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는 가해자들이 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위 ‘땅콩 회항’ 사건의 가해자가 지탄받을 때, 그의 여동생이 내뱉었다는 한마디가 의미심장하다. “언니, 참아. 내가 복수해줄 거야.” ‘뭐 싼 놈이 성낸다’는 식으로 가해자가 피해자로 돌변해 복수를 다짐한다. 오대수 꼴이다. 그 여동생이 언니의 복수를 위해 이번에 물컵을 날렸는지, 그의 어머니가 ‘땅콩 회항’ 사건으로 억울하게 당한 큰딸의 복수를 위해 ‘아랫것’들에게 쌍욕을 퍼붓고 가위를 던졌는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이번에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면 그들이 또다시 오대수처럼 복수심에 불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가해자는 사라지고 오대수와 이우진 두 명의 피해자만이 남아 처절한 복수극을 벌이는 꼴이다. 복수란 ‘뫼비우스의 띠’처럼 불가해한 일이다. 결국 오대수는 혀를 자르고, 이우진은 자살로 그들의 불가해한 복수극은 막을 내린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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