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단축’ 연착륙의 조건

한국경제에 필요한 것은 규제혁파와 혁신성장이지 무리한 재정확대가 아니다. 지금 당ㆍ정ㆍ청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숙고해 봐야 한다.[사진=뉴시스]
한국경제에 필요한 것은 규제혁파와 혁신성장이지 무리한 재정확대가 아니다. 지금 당ㆍ정ㆍ청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숙고해 봐야 한다.[사진=뉴시스]

7월부터 시행되는 주 52시간 근무제도에 대해 정부가 6개월간 처벌을 유예하는 계도기간을 두기로 했다. 고용현장에서 혼선을 빚자 시행을 불과 열흘 앞둔 20일 당ㆍ정ㆍ청이 한국경영자총협회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을 취했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가 7월 1일 강행 방침을 고수하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나섰다.

김영주 고용부 장관은 “시행해 보고 보완할 부분이 있으면 보완하겠다”며 강행 의지를 밝혔다. 무책임한 발언이다. 국민을 정책 실험 대상으로 삼느냐는 불만이 나올 만하다. 국회가 주 52시간 근무를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처리한 것이 지난 2월 27일인데, 그동안 뭘 하고서 ‘시행 이후 보완’을 말하는가. 

고용 현장에선 부서 회식이나 거래처와의 식사ㆍ출장 중 이동시간 등을 업무로 봐야 할지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이다. 대기시간이 긴 영업직원의 근로시간을 어떻게 계산할지도 고민거리다. 그런데 고용부가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을 20일 앞둔 11일에야 내놓은 가이드라인은 노사간 별 이견이 없는 과거 행정해석과 판례 소개에 그쳤다. 

이를테면 워크숍은 근로시간이지만, 회식은 사용자가 강제해도 근로시간으로 보기 어렵다는 정도였다. 그러면서 ‘사용자의 지휘ㆍ감독을 받으면 기본적으로 근로시간이지만, 개별 사업장ㆍ근무형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해석했다. 애매모호한 것들은 노사가 알아서 따로 정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법원으로 가서 해결하라는 식이다.

장시간 근로관행을 바꿔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 문화를 정착시키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도록 하자는데 누가 반대할까. 근로시간 단축은 기업 활동과 고용시장에 큰 변화를 몰고 올 중대 사안이다. 근로시간을 위반한 사업주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세밀한 보완책을 강구해야 함에도 덜컥 근로시간만 줄이겠다니 현장이 혼란을 겪는 것 아닌가.  

정부도, 기업도 6개월 계도기간에 미흡한 부분을 중점 보완해야 마땅하다. 고용부가 근로기준법 개정안 통과 이후 넉달 동안 해온 것처럼 허송했다가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후폭풍 이상으로 기업 활동과 고용시장에 영향을 미쳐 경제 전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우선 시급한 것은 주문이 몰릴 때 일을 더 하고 나중에 쉬게 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 기간 확대다. 미국ㆍ프랑스ㆍ일본은 1년의 단위 기간을 두고 탄력 근로제를 운영한다. 그런데 우리는 길어야 3개월 이내인데다 이마저 요건이 까다롭다. 개정 근로기준법 부칙에 탄력 근로제 개선 방안을 강구하도록 규정했지만 여태 논의조차 없었다.

경총이 제안한 ‘인가연장근로’의 허용 범위 확대도 검토돼야 한다. 산업의 특성상 한시적으로 근로시간을 집중해 늘려야 할 데가 있다. 석유ㆍ화학ㆍ철강업의 대정비ㆍ보수작업이나 조선업의 시운전이 그런 경우다. 해외건설이나 정보기술(IT), 벤처업계 등도 연속 근무가 효율적이라며 근로시간 단축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는 입장이다. 운전기사 확보 경쟁에서 수도권에 밀리는 지방의 노선버스 운행 마비 대책도 세워야 한다. 

때마침 나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국경제 보고서가 노동시장 개혁을 충고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 “인건비 상승이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다”며 내년 인상폭은 “올해 인상이 미친 영향을 평가해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관련해선 정규직 보호를 완화하고 비정규직의 직업훈련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의 속도를 조절하고 노동시장 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경고다.

상황이 이럼에도 들리는 이야기는 6ㆍ13 지방선거 이후 처음 열린 고위 당ㆍ정ㆍ청 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재정지출을 ‘깜짝 놀랄’ 정도로 확대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소식이다. 경기가 둔화하리란 전망이 나오는 것을 의식한 듯 “선거가 없는 1년 10개월 동안 경제에 집중해 국민이 피부로 느끼게 하겠다”면서.

지금 우리 경제에 필요한 것은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규제혁파와 혁신성장이지 무리한 재정확대가 아니다. 정부는 시장보다 결코 효율적이지 않고, 세금으로 만드는 일자리는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ㆍ보궐선거에서 압승하고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높은 지금이야말로 과감한 규제혁파와 합리적 노동개혁으로 허약해진 경제체질을 보강할 적기다.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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