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로의 시대와 선택의 시간

스마트 기기는 을乙의 무기가 됐다. 갑질의 현장을 언제든 촬영하고 갑질의 목소리를 실시간 녹음할 수 있다. SNS는 을의 창구다. 영상과 녹취록을 올리면 끝이다. 갑갑甲甲한 성에서 세상의 을들을 압박하던 기업 오너들에겐 좋은 세상이 아니다. 이전엔 돈이나 압박으로 회유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 쉽지 않다. 탄로의 시대, 기업 오너들에게 선택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탄로의 시대를 취재했다. 

우리나라 기업 대부분은 ‘황제식 오너경영’을 벗지 못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 기업 대부분은 ‘황제식 오너경영’을 벗지 못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1. 구글 직원들은 인트라넷 ‘moma’를 통해 모든 업무를 공유한다. 여기엔 극소수 민감한 정보를 제외한 모든 내부 정보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협력하기 위해서는 서로 잘 알아야 한다”는 래리 페이지 구글 CEO의 경영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1998년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스타트업 중 하나에 불과했던 구글은 20년 뒤 세계를 뒤흔드는 기업 중 하나로 성장했다.

#2. 중국 IT 기업 샤오미엔 엄격한 출퇴근 관리나 복장 규정이 따로 없다. 단순한 직급체계도 눈에 띈다. CEO 밑에 각 팀장과 엔지니어가 있을 뿐 나머지는 직급이 없다. 경직된 중국 기업가들 사이에서 레이쥔 샤오미 CEO는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기업문화를 동경하고 이를 회사에 심었다. 이 회사는 ‘대륙의 실수’라는 별명을 넘어 최근 시장 다각화로 글로벌 점유율을 늘려가는 중이다.

페이스북, 넷플릭스, 에어비앤비 등 4차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글로벌 기업의 리더십엔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바로 탈脫권위다. 이는 우리가 알던 CEO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산업화 시절, 우리 기업들은 단시간에 최대 효과를 내야 했다. 깐깐한 이사회를 일일이 설득할 시간은 없었다. 상명하복 기반의 수직적 소통 구조가 필요했다. 덕분에 전례 없이 빠른 경제 성장을 거쳤고, 이는 한국식 기업 문화로 정착했다.

이 문화를 이끈 건 각 기업의 창업주(오너)다. 이들은 남다른 결단력과 경영 능력을 인정받고 ‘한강의 기적’의 주역이 됐다. 조직 모두가 오너의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기업의 전체적인 방향과 비전도 오직 ‘회장님’만 만들 수 있었다. 오너와 기업을 동일시하는 시선도 이때 생겼다. 그사이 직원들은 기업의 구성원이 아닌 이윤 창출의 수단이 됐다. 조직에서 언제든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는 부품 취급을 받았다.

 

부작용은 있었다. 경영 견제 장치인 이사회는 거수기로 전락했다. 주주총회는 의례적 절차로만 남았다. 기업은 횡령과 탈세 등 각종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구조가 됐고, 실제로 비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부작용은 저항을 불렀다. 오너의 모럴해저드를 지적하는 국민이 갈수록 늘어났고, 문어발식 영업 확장으로 상징되는 탐욕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거세졌다. 저항은 늘 그들의 힘에 눌렸지만 최근 분위기는 다르다. 

글로벌 기업의 사례에서 보듯, 혁신과 융합이 키워드인 4차산업혁명기에선 황제식 오너경영은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걸림돌 취급을 받는다. 한국 기업도 이를 적극 이해하는 모양새다. 재계 맏형 삼성은 2016년 3월 ‘스타트업 삼성’이란 비전을 선포하고 자율ㆍ창조 중심의 기업문화를 심었다. 지난해엔 기존 7단계 직급을 4단계로 줄이고 임직원 간 공통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이밖에도 SK, CJ, 포스코 등 굴지의 기업들이 호칭을 없애거나 단순화했다. 우리나라 몇몇 기업들이 4차산업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 변신을 꾀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변신이 뼛속까지 바꾸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결과물도 약하다. 대한상공회의소와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가 발표한 보고서 ‘한국기업의 기업문화와 조직건강도’의 진단을 보자. 

대기업 직장인 2000명에게 “기업문화 개선 효과를 체감하느냐”고 묻자, “근본적인 개선이 됐다”는 대답은 12.2%에 그쳤다. 전체의 59.8%는 “일부 변화는 있으나 개선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답했고, “이벤트성일 뿐 전혀 효과가 없다”는 절망적인 대답도 28%에 달했다. 직장인이 기업문화 개선활동을 평가할 때도 ‘무늬만 혁신’ ‘재미없음’ ‘보여주기’ ‘청바지 입은 꼰대’ ‘비효율’ 등 부정적인 단어가 대다수였다.

 

김호균 명지대(경제정보학) 교수는 “기업의 중요결정은 이사회가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건 오너들”이라면서 “이들의 무소불위 권력엔 흠집도 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기업 문화가 바뀌겠는가”라고 꼬집었다.

기업문화 무늬만 혁신

문제는 이런 경영 방식을 계속 끌고 나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몇년새 오너 일가의 갑질을 두고 폭로가 쏟아지고 있다. SNS 등 각종 미디어의 발달로 이들의 안하무인식 행태가 널리 퍼지게 됐다. 최근 한진그룹 일가가 줄줄이 구속된 것도 SNS의 영향이 크다. 비뚤어진 오너 의식에 쌓이고 쌓인 불만이 각종 SNS 채널로 터져 나오는 탄로綻露의 시대다. 갑갑甲甲한 성에 갇힐 것인가, 기업의 을乙과 공생하면서 새로운 생태계를 가꿔나갈 것인가. 오너와 오너 일가에게 ‘선택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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