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로의 시대, 을의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책임’
탄로의 시대, 을의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책임’
  • 김다린 기자
  • 호수 295
  • 승인 2018.07.0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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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에겐 어떤 과제가 부여됐나

을이 호기를 맞았다. 갑질을 규탄하고, 미투 운동의 중심이 됐다. 무기는 SNS다. 이를 활용하면 갑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전파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기가 계속될지는 의문이다. SNS가 불투명한 폭로의 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서다. 익명성이 보장된 SNS에 외부세력이 개입해 여론을 조작할 수도 있다. 대한항공의 노노 갈등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탄로의 시대, 을에게도 책임이 부여됐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탄로의 시대, 을의 과제를 취재했다. 

SNS가 서민들의 억울함을 폭로하는 창구로 활용되고 있다.[사진=뉴시스]
SNS가 서민들의 억울함을 폭로하는 창구로 활용되고 있다.[사진=뉴시스]

“1년 전, 임원회의에서 사소한 갈등이 발생했었는데 이게 전 직원에게 퍼져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직장인 익명 SNS 애플리케이션(앱)에 누군가 내용을 올렸더라. 이후 사내 여론을 파악할 수 있고 민감한 불평도 게시돼 흥미롭게 봤다. 하지만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는 이슈가 올라올 땐 표정 관리가 어렵다. ‘미디어를 통해 공론화가 되면 어쩌나’란 생각에 밤잠을 설칠 때도 있다. 게시자가 누군지 궁금하다가도, 색출 시도를 하다가 맞을 역풍을 떠올리면 끔찍하다.”

IT 기업 관리부서 임원의 하소연이다. 우리 사회의 소통창구가 된 SNS의 힘은 강력하다. 단순히 개인 사생활을 공개하고 공유하는 친교 활동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여론을 만들기도 하고,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정부 부처부터 각 기관ㆍ단체ㆍ기업 등에서 여러 SNS를 예의주시하는 이유다.

익명성이 주는 용기

특히 기업들은 SNS ‘블라인드’에 주목한다. 블라인드는 회사 메일 계정 인증을 통해 재직 중인 직원만 가입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 앱이다. 현재 5만개 기업 소속 130만명 이상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남들 앞에선 쉽게 꺼내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게 이 앱의 장점이다. 익명 공간의 특성상 연봉이나 근무 환경을 묻는 가벼운 질문부터 회사나 상사의 불만을 쏟아내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익명 SNS가 직장 내 부조리를 고발하는 폭로창구로도 활용된다는 점이다. 4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땅콩회항’과 최근의 ‘물컵 갑질’의 발화점은 미디어가 아니라 블라인드였다. 

 

과거엔 기업 내 불합리한 사건이 발생해도 가벼운 처벌이나 합의로 무마되는 경우가 숱했다. 시간이 지나면 여론의 관심 밖으로 벗어났다. 하지만 SNS를 통한 2차 확산이 활발한 지금은 다르다. 한진그룹 직원들은 익명 채팅방을 만들어 총수 일가의 갑질 행태를 제보 받았다. 각종 문제들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한진그룹 오너일가는 올해 들어 벌써 4명이나 검찰 포토라인에 섰다. 

한진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엔 아시아나항공이 말썽이다. 기내식 없이 비행하는 ‘노밀(No Meal)’ 운항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직원들의 불만은 오너 일가로 향했다. 기내식 대란의 원인이 된 ‘기내식 공급 업체 교체 결정’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경영권 확보와 깊게 연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이 개설한 익명 SNS엔 박 회장의 욕심을 성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박 회장과 사측이 벌인 ‘갑질’ 의혹도 숱하게 쏟아내고 있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노동법률단체 ‘직장갑질119’가 만든 익명 SNS 채팅방에는 지금도 1만2000명의 직장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SNS는 을乙이 갑甲에게 맞설 수 있는 개혁의 장이 됐다. 직장갑질119의 윤지영 변호사는 “갑질 피해 직장인들이 직장 내 2차 피해를 두려워하는데, SNS의 익명성은 이 피해를 덜어줄 공산이 크다”면서 “앞으로도 사회 부조리를 폭로하는 데 있어 SNS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SNS가 진짜 개혁의 주체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숱한 과제를 풀어야 한다. 무엇보다 SNS의 전파력이 신뢰를 잃으면 을의 소통장구는 단숨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 가상화폐의 사례를 들어보자. 가상화폐 이슈가 사회문제로 번진 데는 SNS의 영향이 컸다. 정부 정책을 두고 유언비어가 쏟아졌고, ‘특정 가상화폐가 곧 폭등하니 사라’라는 글이 반복적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유포하기 쉽다는 거다. 무책임한 말이나 폭력적인 말, 상대를 공격하는 비난도 자주 벌어진다.

최근 한진그룹에서 발생한 노노勞勞 갈등도 비슷한 사례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 사건 이후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조직 ‘직원연대’의 움직임은 갈수록 투명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한항공 노조가 아닌 외부세력이 들어와 활동을 하는 게 아니냐는 거였다. 

대한항공 노조 관계자는 “매번 집회 때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간부가 준비를 주도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면서 “실체가 모호한 직원연대가 노동자간 분열을 조장하는 걸 보고만 있진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을들의 목소리 모으려면…

전문가들은 못된 갑에 저항할 명분과 기회를 얻은 을 역시 자정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IT 전략 컨설팅 업체 테크프론티어 한상기 대표의 설명을 들어보자. “SNS는 권력과 위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불의를 폭로할 수 있는 만큼 긍정적인 요소가 뚜렷하다. 하지만 지나친 왜곡과 폭력만 이어진다면 국민들은 그 가운데 섞인 진실한 폭로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SNS 내 자정작용과 후속조치가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을들은 억울함을 표현할 소통 창구를 하나 잃게 된다.” 

SNS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여전히 유용하다. 특히 서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2016년 수많은 서민들이 목소리를 낸 촛불집회는 정부와 정치세력을 바꾸고 끝났다. 그럼에도 서민들의 팍팍한 삶은 바뀐 게 없다. 촛불은 현재진행형이란 얘기다. 이걸 다시 켜는 것도, 끄는 것도 촛불의 몫이다. 을의 창구 SNS가 투명성과 도덕성을 잃어선 안 되는 이유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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