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길 먼 주 52시간 근무제

“이제 우리 사회도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해졌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연일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말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유통 업체들도 관련 콘텐트로 직장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현실도 그럴까.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은 정말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됐을까. 눈과 귀를 현혹하는 말을 걷어내고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아직은 갈길이 먼 주 52시간 근무제를 취재했다. 

저녁이 있는 삶은 필요하지만 시기상조란 의견도 많다.[사진=뉴시스]
저녁이 있는 삶은 필요하지만 시기상조란 의견도 많다.[사진=뉴시스]

중소기업에서 설계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호석(가명ㆍ36)씨는 최근 뉴스를 볼 때마다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 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직장인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갖게 됐다는 뉴스가 그야말로 ‘남의 일’이라서다. 김씨가 근무하는 회사는 2년 후인 2020년에야 주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된다. “주변만 봐도 주 52시간 근무제를 적용 받는 이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주 52시간 근무제 자체가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도 세상은 이미 모든 직장인에게 저녁이 생긴 것처럼 말하고 있어 씁쓸하다.” 

정주아(가명ㆍ31)씨는 대기업에 다닌다. 정씨가 다니는 회사는 7월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됐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퇴근시간 후에도 해야 할 일이 많은 정씨는 아직까지 주 52시간 근무제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에서도 유예기간을 이유로 들며 “차근차근 개선해 나가자”고 한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 등록하려고 했던 중국어학원도 6개월 후에나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정씨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아직 ‘그림의 떡’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기 위한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 시행됐다. 지난 1일부터 노동자가 일주일 동안 일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이 52시간(평일ㆍ휴일근로 포함)으로 제한됐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야근이 일상인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실제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연간 2052시간(2016년 기준)을 일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멕시코(연간 2348시간) 다음으로 노동시간이 많다. 미국(1789시간)과 일본(1724시간)은 물론 OECD 평균(1707시간)보다 연간 345시간을 더 일한다. 피로사회, 번아웃증후군 등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전격 도입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저녁 있는 삶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기대가 꿈틀댔고, 유통업계가 먼저 반응했다. “워라밸 열풍과 주 52시간 근무제로 퇴근 후 문화센터를 찾는 젊은 고객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여름학기에 직장인 대상 강좌를 확대했다”면서 직장인을 잡기 위한 프로그램을 늘렸다. 

롯데백화점 문화센터는 올 여름학기 20~30대 직장인 대상 강좌를 지난해보다 약 150% 늘렸다. 피트니스 위주였던 저녁 강좌를 재테크ㆍ메이크업ㆍ꽃꽂이 등으로 다양화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백화점 문화센터를 찾는 20~30대 고객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며 “봄학기에 실험적으로 시행한 워라밸 테마 강좌 수강생이 지난해 봄학기 대비 37%가량 늘었고, 이번 여름 강좌 또한 워라밸 강좌 비중을 전체의 30% 정도로 강화했다”고 밝혔다. 

신세계백화점도 이번 여름학기 강좌 중 5시 이후 강좌를 10% 확대했다. 강좌도 직장인들이 관심을 갖는 재테크, 건강관리 위주로 늘었다. 현대백화점은 여름학기에 직장인 대상으로 진행하는 오후 6시 이후 강좌를 지난 여름학기 대비 10~20% 추가로 개설했다. 발레ㆍ요가ㆍ피트니스 등 몸매 관리 강좌부터 휴가 시즌을 겨냥한 여행사진 찍기ㆍ드로잉도 추가했다.

문제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실제로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주 52시간 근무제를 적용받는 직장인보다 그렇지 않은 직장인이 훨씬 많다. 300인 이상 기업은 7월부터 시행했지만 50~299인 기업은 2020년 1월부터, 5~49인 기업은 2021년 7월부터 적용받게 된다.


직장인 대상 강좌 늘렸다지만…

주 52시간을 적용받는 직장인도 ‘저녁’이 마냥 자유로운 것만은 아니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인데 근무시간을 단축하면 결국 일을 집에 싸가지고 가란 것밖에 더 되냐”며 “말이 좋아 저녁이 있는 삶이지, 그 저녁을 내 맘대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직장인도 있다. 영업직의 경우 퇴근 후 이어지는 업무를 52시간에 어떻게  포함해야 하는지 회사마다 가이드라인이 달라 편법이 꿈틀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백화점 문화센터를 찾는 직장인도 언론보도처럼 그렇게 많지 않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백화점 문화센터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워라밸 이슈가 떠오르기 시작한 지난 봄학기에 이미 직장인 대상 특화 강좌가 생겼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늘어났다고 보긴 어렵다.” 올해 문화센터 강좌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갑자기 바뀐 건 아니라는 거다.

영등포의 한 백화점 문화센터 관계자 말도 다르지 않다. “지난 여름학기와 비교해보면 직장인 대상 강좌가 눈에 띄게 늘지는 않았다.” 백화점 업계가 너도나도 직장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문화센터로 향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고 마케팅하고 있지만 아직까진 큰 변화가 없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무엇보다 정부의 오락가락이 문제다. 정부가 위반에 따른 단속ㆍ처벌을 유예하겠다는 ‘6개월 계도기간’을 뒀는데, 국무총리와 관계부처 장관의 말에 온도차가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6개월 단속ㆍ처벌 유예기간을 달라는 경총의 제안을 받아들여 “근로시간 단축 연착륙을 위해 6개월 계도 기간을 두기로 했다”고 밝혔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긴 했지만 사실상 제재가 가해지는 건 6개월 후라는 얘기다. 하지만 관계부처장인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6개월 계도기간을 두긴 했지만 위법에 눈감는 건 아니다”며 계도기간에도 처벌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성급하게 도입했다는 지적, 명확하지 않은 근로시간 기준, 여기에 계도기간을 바라보는 온도차까지…. 여러 혼란을 불러올 수 있는 주 52시간 근무제는 과연 제대로 안착해 직장인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줄 수 있을까.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주 52시간 근무제는 아직 갈길이 멀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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