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풍, Sad Story

홍대ㆍ합정의 밤거리를 수놓은 네온사인이 화려하다. 이곳을 오가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경쾌하다. 여기저기 생긴 일본풍 점포 덕분인지 거리는 정갈하고 예쁘다. 하지만 여기에 새드 스토리(Sad Story)가 숨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지갑이 얇아져 혼자 술 먹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창업하는 시대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일본풍에 깃든 새드 스토리를 경제로 풀어봤다.

서울 번화가를 중심으로 일본을 그대로 재현한 가게가 증가하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서울 번화가를 중심으로 일본을 그대로 재현한 가게가 증가하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트렌드의 바로미터로 손꼽히는 홍대ㆍ합정 상권에 ‘일본 열풍’이 불고 있다. 이자카야居酒屋부터 일본식 가정식까지 한집 건너 한집이 일본어 간판을 내걸고 있다. 한국 거리에 파고든 일본 열풍, 그저 트렌드에 불과할까. 아니다. 일본 열풍엔 한국경제의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젊은층이 붐비는 홍대ㆍ합정 일대. 밤이면 이곳이 도쿄 신주쿠 거리인지 서울인지 헷갈리는 광경이 펼쳐진다. 한글 대신 일본어 간판을 내건 가게들과 3~4층 건물 전체를 일본식 목조 건물로 꾸민 이자카야居酒屋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대형 이자카야뿐만이 아니다. 최근 2~3년 사이 일본 가정식, 라멘집, 소규모 선술집이 골목마다 들어섰다. 홍대ㆍ합정뿐만 아니라 종로ㆍ강남 등 주요 상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런 현상은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일식 브랜드 수는 2015년 89개에서 2017년 154개로 73%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식 브랜드 수는 59%(49개→78개), 서양식 브랜드 수는 16%(112개→130개)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한가지 특이한 부분은 과거 대형 이자카야가 일식 창업의 중심을 이뤘다면 최근에는 테이블 10개 안팎의 소규모 일본 음식점이 붐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홍대ㆍ합정 일대 부동산에는 소규모 일식집을 창업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부동산중개사무소 관계자는 “2~3년 전부터 작은 일식집 점포를 찾는 이들이 하나둘 생기더니 지난해 급증했다”면서 “33~50㎡(약 10~15평)대 가게를 찾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젊은층이 많은 골목길에 일본 열풍이 부는 이유는 크게 세가지다. 첫째, 일본으로 여행을 가는 청년들이 늘면서 일본 음식이나 문화 선호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여행객 수는 최근 4~5년 사이 급증했다. 일본으로 출국한 한국인 수는 2014년 275만명에서 지난해 714만명으로 160% 증가했다. 엔저 현상, 저비용 항공사(LCC)의 노선 확대 등으로 일본이 가성비 좋은 여행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012년 1500원이던 엔화 환율은 900~1000원대로 하락했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 LCC 항공사 수가 많아지고, 이들이 경쟁적으로 티켓 할인 행사를 벌인 게 젊은층에 가장 큰 메리트로 작용했다”면서 “미식ㆍ쇼핑ㆍ온천 등 다양한 목적의 여행이 가능하다는 점도 일본 여행의 장점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실제로 합정동의 한 일본 가정식 집에서 만난 김나영(26)씨는 “제주도 갈 경비면 일본에 갈 수 있어 일본 여행을 선호한다”면서 “일본에서 느꼈던 음식 맛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둘째 이유는 한국보다 앞서 1인 가구 증가, 청년실업 문제 등을 겪은 일본의 트렌드가 그대로 한국에 유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1990년대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서 1인 가구가 급증했다. 일본의 1인 가구 비중은 전체의 34.5%(2015년)로, 2040년에는 40%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본에서 ‘초솔로사회(결혼하지 않는 것이 일반화한 사회)’라는 말이 유행하는 건 단적인 예다. 한국 역시 일본처럼 1인 가구 비중이 꾸준히 늘고 있다. 2010년 전체의 23.9%이던 1인 가구 비중은 2016년 27.9%로 증가했다. 전체 가구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에서 일상화한 ‘혼밥’ ‘혼술’이 한국에서 자리잡은 이유다.

“혼밥, 부끄럽지 않아요”

이승신 건국대(소비자정보학) 교수는 “일본에선 20여년 전부터 끼니를 혼자서 간단히 해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면서 “최근 한국에 부는 편의점 도시락, 소포장 상품도 이미 일본에서 오래된 소비 트렌드다”고 설명했다. 전태유 세종대(유통산업학) 교수는 “각박한 현실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요즘 세대는 혼밥이나 혼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생활 속에서 눈치 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먹는 시간의 즐거움을 갖고 살아야 하다는 게 혼밥•혼술의 기조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심야식당’ ‘고독한 미식가’ 등 일본의 TV 프로그램이 한국인의 ‘혼밥’ 인식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심야식당’ ‘고독한 미식가’ 등 일본의 TV 프로그램이 한국인의 ‘혼밥’ 인식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일본의 TV프로그램도 일본 가게의 증가를 부추겼다. 대표적인 게 ‘심야식당’과 ‘고독한 미식가’다. 2009년 일본 TBS에서 시리즈로 방영한 심야식당은 도쿄의 어느 뒷골목 작은 식당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장 혼자서 운영하는 식당에 늦은 밤 끼니를 때우러온 일본 소시민의 이야기를 다뤘다. ‘허기와 마음을 채워준다’는 캐치프래이즈를 내건 일본 드라마에 한국 젊은층이 열광하면서, 심야식당은 2015년 한국판으로 리메이크 제작됐다.

고독한 미식가도 이슈를 모았다. 2012년 일본 도쿄TV가 시리즈로 방영한 이른바 ‘먹방’이다. 주인공은 수입잡화상인 중년 남성이다. 직업 특성상 늘 혼자 다니는 그는 늘 혼밥을 한다. 하지만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주인공은 고독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미식을 즐긴다.

직장인 박은경(32)씨는 “일본 음식점은 테이블이 작거나 1인 좌석이 마련돼 있어 혼자 식사하기에 부담이 없다”면서 “음식을 공유하고 나눠먹는 한식이 양이 많은 서양식과 달리 1인 메뉴 중심이라서 선호하는 편이다”고 말했다.

불황형 창업 아이템

셋째, 창업하는 입장에서도 리스크가 적은 소규모 창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급증한 일본풍 가게 중엔 작지만 정갈한 콘셉트의 매장이 많다. 전태유 교수는 “일본 특유의 미니멀리즘은 단순하고 정갈함을 추구하는 ‘와비사비侘ㆍ寂(투박하고 조용한 상태)’ 문화와 관련이 깊다”면서 “일본식 가게들도 이런 미美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특유의 분위기는 살리면서 임차료나 인건비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불황형 창업인 셈이다.

부동산 관계자는 “메인 도로보다 임차료가 저렴한 사잇길에 일본식 가게가 들어서는 추세다. 33㎡(10평) 안팎의 매장은 테이블 10개가 채 안 된다”면서 “인건비 부담이 증가하면서 혼자나 둘이서 운영할 수 있는 가게를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승신 교수는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간단하고 단순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심리학) 교수는 “우리와 비슷한 사회문제를 앞서 겪은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라면서 “오랜 경기침체를 벗어나고 있는 일본을 보면서 한국 내에서 일본 문화가 서서히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