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1998년 조례 제정
지하도상인에게 양도ㆍ양수 자율권 부여
상인간 권리금 거래도 사실상 인정
서울시 심의회, 권리금 제재한 적 없어
20년 만에 조례 바꾸면서 공개입찰제 도입
양도ㆍ양수 자율권 사라지고 권리금도 제재
급작스럽게 바뀐 규정에 혼란스러운 지하상인들

서울시는 1998년 조례를 제정해 지하도상가 상인들에게 임차권을 양도ㆍ양수할 수 있는 자율권을 줬다. 권리금이 오갔고, 서울시도 이를 사실상 인정했다. 권리금 문제를 제재한 적도 없다. 그런데, 지난 19일부터 상인들은 권리금을 돌려받을 수 없게 됐다. 서울시가 임차권 양도ㆍ양수를 불허하는 조례 개정안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상인들이 반발했지만 서울시는 ‘원칙’만을 고수하고 있다. 상인들은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걸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서울시 지하도상가의 문제점을 취재했다. 

서울시의 지하도상가 관리 조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면서 지하도상가를 떠나는 사람이 늘었다.[사진=뉴시스]
서울시의 지하도상가 관리 조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면서 지하도상가를 떠나는 사람이 늘었다.[사진=뉴시스]

지하철 2호선과 8호선이 교차하는 잠실역. 항상 사람이 붐비는 잠실역의 한편엔 ‘잠실역지하쇼핑센터(이하 잠실역 지하도상가)’라는 간판 아래 130여개의 상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임진경(48ㆍ가명)씨는 지난해 초 이곳에 작은 옷가게를 열었다. 20여년간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과 어렵게 모은 종잣돈을 털어 넣었다.

권리금만 2억원에 달했지만 “목이 좋아 금방 본전을 찾을 수 있는 데다, 이정도면 저렴한 편”이라는 양도자의 말에 혹했다. “어차피 권리금은 바닥에 깔고 있는 돈”이라는 생각에 크게 개의치 않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막상 가게를 양수하고 보니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에 걱정보단 기대가 앞섰다. 

그로부터 1년 후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새 출발을 앞두고 기대감에 젖어 있던 임씨는 현재 가게를 인수할 사람을 찾고 있다. 임씨뿐만이 아니다. 잠실역 지하도상가에서 1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해왔다는 박금란(63ㆍ가명)씨도 최근 가게를 접을까 고심하고 있다. 김재윤(39ㆍ가명)씨는 임차권 양수 계약을 며칠 안 남겨둔 상황에서 양수를 포기했다. 어찌 된 일일까. 

잠실역 지하도상가는 서울시가 소유하고 서울시설공단이 관리하는 서울 지하도상가의 일부다. 강남역ㆍ영등포역ㆍ명동역ㆍ동대문ㆍ종로 등 서울 전역에 뻗어 있는 지하도상가는 15만6933㎡(약 4만7472평) 규모에 점포수만 2788개(2018년 현재 기준)에 달한다. 

이런 서울시 지하도상가에 ‘엑소더스’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설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부터 상가 임차권을 양도하려는 상인들이 크게 늘고 있다. 임차권을 양도하려면 서울시설공단에서 여는 심의회를 거쳐야 하는데, 올 상반기에만 심의회가 89회 열렸다. 

 

그렇다면 지하도상가를 빠져나가려는 이들이 부쩍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은 지난해 6월 서울시가 ‘지하도상가 관리 조례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시점과 연관성이 깊다. 개정안의 골자는 “지하도상가 임차권의 양도ㆍ양수를 금지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상인들의 큰 반발을 샀다. 임차권 양도ㆍ양수가 막히면 입점할 당시 냈던 권리금을 회수할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서울시설공단 관계자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공유재산의 권리금은 인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울시가 권리금을 공식적ㆍ법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어 문제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지하도상가 뒤흔든 조례 개정안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속사정은 다르다. 1970년대 민간이 개발한 지하도상가는 소상인들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1996년 기부채납을 받은 서울시는 지하도상가 관리 조례를 제정(1998년)했고, 임차권 양도ㆍ양수를 허용했다. 당연히 권리금도 오갔다.

이 조례를 근거로 지하도상가는 안정화됐지만 지난해 6월 서울시가 난데없이 ‘원칙’을 내세웠다. “지하도상가에 입주하기 위해선 입찰경쟁을 거쳐야 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공유재산의 임차권 양도ㆍ양수를 허용하는 건 상위법(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에 위반한다는 행정자치부의 입법해석과 서울시 의회 감사원의 감사 결과가 있었고, 조례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건 이에 따른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의 말은 틀리지 않다. 공개경쟁입찰을 원칙대로 진행하고, 상인 사이에서 오가는 권리금을 규제하는 건 마땅한 일이다. 그렇게만 되면 막대한 권리금을 내기 어려운 소상인, 서민들도 손쉽게 지하도상가에 입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지금의 지하도상가를 누가 혼탁하게 만들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더구나 서울시는 이런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엇보다 임차권의 양도ㆍ양수를 허락한 건 서울시다. 양도ㆍ양수 과정에서 불리한 문제가 발생하진 않는지 확인하는 심의회는 형식적으로 운영됐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상가 임차권을 양수하려다 도중에 포기한 김씨는 이렇게 꼬집었다. “심의회는 신분증 확인, 전대금지 고지, 기존 계약기간 확인 등 간단한 절차만 거친다. 소요시간은 5분여밖에 걸리지 않더라.” 

심의회가 권리금을 언급하긴 했지만 형식적이었다. 심의회에서 주는 한장짜리 ‘임차권 양도ㆍ양수에 따른 권리ㆍ의무 확인서’에는 “양도인과 양수인간에 양도금액이 사실과 다른 경우 양도양수 허가는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심의회는 사실상 권리금의 존재를 알면서도 단 한번도 적발하지 않았다. 서울시설공단 관계자는 “상인들 간에 오가는 권리금을 막을 규정이 없기 때문에 적극 제재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상인은 “권리금이 오가는 건 20년째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서 말을 이었다. “난 권리금을 내고 들어왔다. 이전 상인은 내 권리금을 받아갔다. 그건 불법인가 합법인가. 사실상 규제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원칙을 들이밀면 어쩌란 말인가.”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도시개혁센터 팀장은 “사실 서울시가 금전적으로 보상하려면 세금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생길 수 있다”면서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로 상인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원칙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막바지에 비싼 권리금을 내고 들어온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라면서 “권리금 거래는 음성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서울시는 지하도상가 상인들의 권리금 문제에 소홀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사진=뉴시스]
서울시는 지하도상가 상인들의 권리금 문제에 소홀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사진=뉴시스]

서울시의 조례 개정안은 지난 6월 29일 시의회를 통과해 7월 19일 공포됐다. 조례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모든 임차권 양도ㆍ양수가 막히고, 상인들은 권리금을 돌려받을 길이 없어졌다. 서울시 지하도상가 규모가 총 15만6933㎡(약 4만7472평). 시세가 좋을 때 1평당 권리금이 약 1억원에 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약 4조원가량이 지하에 묻힌 셈이다.

“물질적 보상이 어렵다면 장기간 임차할 수 있는 권리 등 우회적으로 보상할 수 있는 대안이라도 찾아봐야 한다”는 일부의 지적을 귓등으로 흘려들어선 안 되는 이유다. 서울시의 엉성한 정책으로 죽어나는 건 결국 상인들이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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