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가 본 ‘시대 리더십’

이순신 장군의 발길 따라 전국을 누볐다. 그가 태어난 서울 충무로에서 세상을 떠난 남해 관음포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긴 여정을 시작한 건 500년 시간을 뛰어넘어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받은 ‘위안’ 때문이었다.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소통에 능한 리더”라고 잘라 말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를 만났다. 

장정호 「이순신 여행」 저자는 “이순신이 전쟁에 임한 자세와 지혜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사진=천막사진관]
장정호 「이순신 여행」 저자는 “이순신이 전쟁에 임한 자세와 지혜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사진=천막사진관]

✚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몇해 전 사업을 하다가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뜻이 달라 오해를 받기도 했죠. 그때 뜻밖에도 이순신 장군이 떠올랐습니다. 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초를 겪고 고뇌했을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시대를 뛰어넘어 ‘위로’를 받았죠. 그때부터 인간 이순신, 전사 이순신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 한국인은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알지만,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죠.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많은 부분을 알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했죠.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다시 전쟁터로 나가 불가능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자기희생, 충절, 불굴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는 이순신 장군을 배우기에 부족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진짜 요소’를 알아야 합니다.”

✚ 진짜 요소가 무엇인가요.
“23전 23승이다, 30전 30승이다, 사실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기도 하구요. 정말 중요한 건 이순신 장군의 승리가 그냥 승리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죠. 그 비결은 다섯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첫째, 정보를 중시했습니다. 탐망선을 보내 주변 상황을 꼼꼼히 살폈죠. 「난중일기」에는 ‘~보고 하기를’ ‘~들이니’와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이순신 장군은 정보에 목말라 했고, 관심과 주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 소통을 중요시했던 거네요.
“그렇죠. 이순신 장군은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임에도 소통을 활발히 했습니다. 부하들과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덕분에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부하들의 동기부여도 이끌어냈죠.”

✚ 또다른 비결은 무엇인가요.
“이순신은 물질(병참)의 중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군수물자 확보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군량미가 부족해 직접 둔전을 설치해 해결하기도 했죠. 또 새로운 무기와 전술을 파악해 그에 맞춰 대비했습니다. 그 결과가 ‘거북선’이죠.” 

✚ 마지막 한가지는 무엇인가요. 
“지형지물을 파악해 전력을 극대화했습니다. 명량해전이 대표적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의 지형을 파악하고, 울둘목을 필승의 장소로 선점했습니다. 12척의 배로 130여척의 적선을 물리칠 수 있었던 건 내부 역량, 외부 환경, 타이밍을 모두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내부 역량, 외부 환경, 타이밍을 고려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사진은 한산대첩, 김성환)[사진=뉴시스]
이순신은 내부 역량, 외부 환경, 타이밍을 고려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사진은 한산대첩, 김성환)[사진=뉴시스]

✚ 우리는 이순신에게서 어떤 점을 배워야할까요.
“이순신은 미래를 내다보고 전쟁에 미리 대비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변화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역량을 강화해야 합니다. 내부적인 갈등을 매듭짓고 미래를 이야기 해야죠.”

✚ 여행을 통해 얻은 가르침이네요. 책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시작했나요. 
“처음부터 책을 쓰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데 이순신 장군의 여정을 따라 여행한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의 발길을 좇았습니다.”

백전백승보다 중요한 가치

✚ 얼마나 걸렸나요.
“한달에 한번 1박2일~2박3일 일정으로 답사하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더 가봐야 할 곳이 많습니다. 최근에는 이순신 장군이 피눈물 흘리며 걸었던 ‘백의종군로’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의금부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와 경기 인덕원을 거쳐, 충남 공주~전남 구례~남해로 이어지는 그 길을 걸어볼 생각입니다.”

✚ 이순신 장군 관련 유적은 전국 곳곳에 있네요.
“이순신 장군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충무로(중구 마른내로 47)’는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죠. 이후 어머니의 고향으로 전해지는 충남 아산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후 함경도에서 근무했고,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 남해바다를 수호했죠.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전국 곳곳에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살아있습니다.”

✚  충남 아산에는 이충무공묘소가 있죠.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은 아산에 대대로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고향이자, 부인을 만나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합니다.”

✚ 이순신은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셋째 아들인 이순신 장군은 큰형 희신과 둘째형 요신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장자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에게 각별했습니다. 흔히 효孝는 가족 중심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효심은 사회적인 배려, 백성과 부하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위해 죽기로 싸웠던 것도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초가 됐던 거죠.”

✚ 그래서 부하들이 그를 따랐던 걸까요.
“좋은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전쟁을 치르고 나면 임금에게 올릴 장계를 적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의 공로를 먼저 자세히 적었습니다. ‘신의 군관 OO가 적을 OO명 무찔렀습니다’ 모두 적은 후에 맨 마지막에 ‘신도 함께 싸웠습니다’라고 적었죠.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의 공을 높이 세웠습니다. 자신이 인정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지 않았죠. 어느 부하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죄를 지은 부하에겐 엄격했죠.
“신상필벌을 제대로 했던 거죠.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도망을 쳐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린 부하는 엄격하게 벌했습니다.”

✚ 오늘날 지도자가 배워야할 점이 많은 듯합니다.
“그렇죠. 나라든 기업이든 리더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파직당하고,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된 후 조선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합니다. 같은 부하들인데도 원균 아래에선 실력 발휘를 못했죠. 리더가 그만큼 중요한 거죠.”

✚ 우리 시대에 이순신 장군 같은 리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보통 사람 중에 큰 사람이 나온다’고 하죠. 이순신 장군은 32살에 무과에 급제하고, 47세가 돼서야 전라 좌수영에 장군으로 부임했습니다. 빛을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죠. 하지만 아군과 적군의 마음, 백성의 마음을 파악해 전투에 임해 무패의 장수가 됩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주위를 두루 살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가진 이가 우리 시대의 좋은 리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순신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요. 
“이순신이 지닌 콘텐트는 K-pop이나 한글만큼 한국의 위상을 높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세계사적으로도 이순신 같은 동양의 인물이 편입되는 것이 세계 역사와 문화 발전을 풍요롭게 할 겁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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