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올드보이 ❼

‘질문’은 중요하다. 질문은 모든 문제 해결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인 ‘진단과 처방’에서 ‘진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왜’ 아픈지를 알아야 비로소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진단이 잘못되면 당연히 잘못된 처방이 따를 수밖에 없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자기를 15년간 가뒀던 원흉을 만난 주인공이 질문한다. “나를 왜 가뒀느냐?”

오대수는 이우진이라는 호랑이를 잡으러 그가 사는 숲속에 뛰어든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오대수는 이우진이라는 호랑이를 잡으러 그가 사는 숲속에 뛰어든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는 마침내 눈물겨운 추적극의 결실을 맺는다. 그는 이우진(유지태)의 호화스러운 펜트하우스에서 자신을 15년간 감옥에 가뒀던 원흉을 마주한다. “나를 왜 가뒀느냐?” 오대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15년간 머리를 쥐어짜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질문을 이우진에게 던진다. 이우진은 자신을 왜 가뒀냐는 오대수의 질문을 조롱한다. “질문이 잘못됐다. 자꾸 왜 가뒀는지를 물으니까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왜 가뒀느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느냐고 물어야지.”

사람들에게 ‘질문’은 중요하다. ‘진단과 처방’ 중 ‘진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면 ‘왜’ 아픈지 알아야 그에 알맞은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잘못될 수밖에 없고 병이 나을 수 없다. 질문에 대한 가설에 따라 목표가 정해지고 그 목표를 향해 행동한다.

오대수는 자신이 제기한 질문과 그 질문에 따라 설정한 목표에 스스로 갇힌다. 자신을 ‘이유 없이’ 15년간 가두고 군만두만 먹인 악당은 이우진이라는 놈이다. 그 놈을 잡아 ‘씹어먹어야’ 원한이 풀린다. 오대수는 이우진이라는 호랑이를 잡으러 장도리 한자루 꼬나 쥐고 그가 사는 숲에 뛰어든다.

하지만 오대수는 그 숲이 어떤 숲인지도 모르고 그저 호랑이 잡으러 숲속에 뛰어든 사냥꾼 꼴이 된다.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자신이 갇힌 이유에만 집착하고 이우진에게만 온 신경을 쏟는다. 만약 오대수가 자신이 풀려난 이유도 그만큼 고민했다면 이우진이 그리던 ‘복수의 숲’을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숲이 어떤 숲인지 알았다면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답을 구하고 싶다면 제대로 질문해야 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답을 구하고 싶다면 제대로 질문해야 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숲속이 위험한 것은 호랑이 때문만은 아니다. 호랑이를 향해 화살을 겨누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뱀이 발을 물 수도 있다. 오대수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 예상치 못했던 극강의 호위무사(김병옥)의 목에 볼펜을 꽂아 제압한다. 이제 호랑이만 잡으면 된다. 그러나 오대수는 그제서야 자신이 헤어나올 수 없는 숲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숲속에 들어와 호랑이만 신경 썼을 뿐, 자신이 헤치고 들어온 숲이 ‘근친상간의 숲’이라는 것을 몰랐다.

오대수가 이우진이 최고급 듀퐁 양복을 자신에게 입히고 두둑한 지갑과 휴대전화까지 안겨 풀어준 이유를 궁금해 했다면, 적어도 자신의 딸과 근친상간에 빠지는 형벌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불행하게도 오대수는 자신을 15년간 가뒀다 풀어줘 완성하고자 했던 이우진의 ‘복수의 전체 설계도’를 읽지 못했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들이 동시에 구치소에 앉아 수갑을 차고 번갈아 재판정에 드나드는 전대미문의 참상이 벌어진다. 많은 정치인들은 선거에 떨어지면 ‘왜 떨어졌을까’를 생각하지만 당선되면 ‘왜 당선되었을까’를 생각지 않는 모양이다. 시험에 떨어지면 ‘왜 떨어졌을까’를 생각하고 다음을 기약하지만, 합격하면 ‘내가 왜 합격했을까’를 생각지 않는다.

국민들이 ‘왜 나에게 권력을 위임했을까’를 생각했다면, 그리고 국민들이 자신에게 권력을 위임하면서 마음 속에 품은 설계도를 고민했다면 이렇듯 불행한 사태가 이어지지는 않았을 듯하다. 오대수가 계속 갇혀 있었다면 딸과의 근친상간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풀려났기 때문에 저지른 죄이고 불행인 셈이다. 이우진의 조롱처럼 오대수가 풀려났을 때 ‘왜 풀려났을까’를 계속 생각했다면 혹시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선거에 당선된 많은 정치인들이 ‘왜 당선되었을까’를 생각하지는 않는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선거에 당선된 많은 정치인들이 ‘왜 당선되었을까’를 생각하지는 않는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잉게보르크 바흐만(Ingeborg Bachmann)의 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처럼 날개가 있어 높이 날아 올랐기 때문에 추락한 것이다. 날아오르지 않았다면 추락할 일도 없다. 오대수는 듀퐁 양복에 두둑한 지갑의 날개를 달고 새장에서 풀려나 날아오른다. 그리고 처참하게 추락한다. 두 전직 대통령이 계속 낙선했다면 수갑을 차고 호송되는 최악의 불행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당선된 후 ‘국민들이 왜 나를 뽑았을까’를 계속 생각했다면 혹시 피할 수도 있었을 불행인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이라는 날개를 달고 거칠 것 없이 날아올라 한순간 맨 땅에 패대기쳐졌다.

이번 지방선거도 수많은 낙선자와 당선자를 남겼다. 많은 낙선자들은 ‘왜 떨어졌을까’를 곱씹고 있겠지만 ‘왜 당선됐을까’를 생각하는 당선자가 몇이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정치’라는 숲이 어떤 숲인지 알고 뛰어들지 말아야 할 정치인도 많다. 선거가 그 사람들을 모두 걸러줄 수는 없다. 당선자들이 ‘왜 당선됐을까’를 계속 곱씹는다면 우리 정치사의 불행도 그만큼 줄어들 것 같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