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비명과 날카로운 비명 교차
일부 상인 치솟은 임대료에 눈물
세운상가 밖 상인들은 재개발 논란에 눈물

‘넓어진 공중 보행길’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 ‘멋진 공공 전망대’…. 세운상가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일궈낸 성과다. TV와 미디어에서도 칭찬 일색이다. 하지만 세운상가 안팎엔 즐거운 비명과 날카로운 비명이 교차하고 있다. 세운상가의 일부 상인은 한껏 치솟은 임대료에, 세운상가 주변 상인은 재개발에서 소외된 억울함에 몸서리친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세운상가를 걸어봤다. 서로 다른 두 비명의 불협화음은 슬펐다.

세운상가의 옥상에 올라서면 도시재생 사업의 민낯이 드러난다.[사진=천막사진관]
세운상가의 옥상에 올라서면 도시재생 사업의 민낯이 드러난다.[사진=천막사진관]

세운상가를 처음 마주한 건 2010년. 음악을 하던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곳을 찾았다. “요새 나오는 공장 스피커로는 영감을 끌어내기 어렵다. 세운상가에서 옛 스피커를 찾아보자.” 눈앞에 펼쳐진 세운상가 겉모습은 실망스러웠다. 덩치만 컸지 쇠락한 기운이 가득했다. 낡은 나무 난간을 건너 내부로 진입하자 음산한 분위기에 짓눌렸다. “이런 데 뭐가 있다는 거야”라는 기자의 숱한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친구는 묵묵히 걸었다.

끝내 친구는 진공관이 달린 빈티지 오디오를 샀다. 돈을 받은 사장의 이마엔 주름이 가득했다. 그제야 ‘빽판(LP복제판)’을 구하기 위해 세운상가를 배회했다던 부모님의 말이 떠올랐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름 긴 역사를 품고 있는 세운상가가 왜 그렇게 흉물스러운 콘크리트로 변했는지 당시엔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꼭 8년 후인 7월 25일 오전 11시. 기자는 세운상가 일대를 찬찬히 걸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에서 내려 5분 정도 지나 왼편에서 종묘광장공원의 숲이 보일 때쯤이었다. 세운상가의 윤곽이 드러났다.

지난해 9월 도시재생으로 새 단장을 한 덕일까. 8년 전 세운상가의 낡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감각 있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다시세운상가’라는 언어유희로 이곳을 포장한 서울시의 재생사업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 1단계 사업으로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잇는 보행로를 만들었고, 2단계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완료되면 종로에서 퇴계로를 가로지르는 총 연장 1㎞(종로~퇴계로) 사이 세운상가 7개 건물군(세운ㆍ청계ㆍ대림ㆍ삼풍ㆍ풍전ㆍ신성ㆍ진양)을 공중보행로로 건널 수 있다. 이를 통해 세운상가 일대를 글로벌 관광단지로 조성하겠다는 게 서울시의 전략이다.

다시 태어난 세운상가를 보기 위해선 완만한 경사의 공터를 올라야 했다. 우뚝 선 인왕산 봉우리를 바라보는 조형물 ‘세봇’이 먼저 기자를 반겼다. 세운상가가 과거 명성을 되찾고 서울의 중심에서 세계의 중심까지 발돋움할 수 있는 명소가 되길 염원하는 로봇 조형물이다. 세봇을 등지고 철제 계단을 오르자 ‘세운전자박물관’이 나왔다. ‘청계천 메이커 삼대기’란 제목의 전시관엔 옛날 라디오를 비롯해 노래방기기ㆍ3D프린터ㆍ드론 등 시대별 전자제품을 늘어놓았다.

세운상가의 색다른 변신

그중에서도 눈길을 끈 건 세운상가에 새롭게 입주한 청년 창업가와 세운상가 장인이 협업해 만든 블루투스 스피커였다. 서울시는 재생사업을 통해 정비한 보행로 중간에 청년들을 위한 창업공간을 마련했다. 세운상가를 ‘첨단 혁신제조기지’로 탈바꿈하겠다는 도시재생 사업의 비전 때문이다. 이 스피커는 비전의 결과물이다.

스피커를 만들었다는 배현종 보리(드론제조업체) 대표의 사무실을 노크했다. 배 대표는 “청년 창업가로선 이보다 좋은 공간이 없죠”라며 말문을 열었다. 촬영감독이었던 배 대표는 드론 촬영 장비를 직접 만들다 1년 전 드론 기업 창업에 나섰다. “자금이 부족한 청년 창업가는 당연히 서울시 외곽에 사무실을 얻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운 좋게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알게 되면서 서울의 중심, 그것도 한국 제조 산업의 집적지에서 둥지를 텄죠. 여기서는 부품을 구하느라 고민할 일이 없어요. 드론을 만들다 부족한 게 있으면 사무실을 뛰쳐나가면 됩니다.”

 

세운상가를 제외한 주변 지구는 모두 재개발 대상이다.[사진=천막사진관]
세운상가를 제외한 주변 지구는 모두 재개발 대상이다.[사진=천막사진관]

세운상가 기술 장인들로부터 배우는 현장의 노하우도 배 대표에겐 돈 주고 못 살 기회였다. 그만큼 청년 창업가들은 기존 상인들과 소통할 시간이 많았다. 시와 상인, 청년 창업가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조정하고 위기를 관리하는 ‘세운공공’이란 민간 조직이 소통을 주도한 덕분이다. 배 대표는 “세운상가에서 젊은 아이디어와 설계에 장인의 노하우가 더한 제품이 등장해 한국 제조 산업의 역사를 바꾸길 기대한다”며 말을 마쳤다.

사무실을 나오자 생소한 광경이 펼쳐졌다. 감각 있는 인테리어를 적용한 이국적인 분위기의 카페와 디저트 가게가 청계상가 외곽에 줄지어 있었다. 경리단길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그 오른편으론 ‘다시세운보행교’가 있다. 청계천 복원공사 당시 끊겼던 보행교를 다시 연결하는 이 작업은 1단계 재생사업의 중점 사업이었다. 시원한 청계천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게 이 보행교의 강점이었다. 다리 위를 부유하듯 걷는 시민들의 발걸음도 흥미로웠다.

도시재생 민낯 드러난 옥상

세운상가를 지키는 세봇이 있는 곳으로 돌아 나오자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뭐 보러 오셨어요?” 다시세운상가의 관광가이드라며 본인을 소개한 중년남성은 새 단장한 세운상가의 이모저모를 자랑했다. “이미 다 가봤어요”라고 답하자 “그럼 이제 세운상가의 최대 자랑인 서울옥상만 보면 되겠네요. 정말 멋진 전망대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됩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7월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빼곡한 스케줄은 배 대표의 말대로 상가 내에서 활발한 소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쯤 되면 “세운상가는 도시재생의 롤 모델로 삼기에 충분하다”는 주변의 평가가 적절해 보였다.

시는 서울옥상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보기 위해 외곽으로 나가거나 가장 높은 건물에 올라 주변을 내려다보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도심 한가운데서 탁 트인 옥상 위를 자유롭게 거닐며 서울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장소는 서울옥상이 유일하다.”

하지만 기자의 감상은 달랐다. 독일 출신 미학자 발터 벤야민의 문구가 먼저 떠올랐다. “도시는 겉으로 보기엔 비슷하다. 하지만 도시의 이름마저도 구역에 따라 다른 울림을 갖게 될 때가 있다.”

서울시가 그토록 극찬한 ‘서울옥상’ 바로 아래 보이는 풍경은 세운상가 안팎의 ‘슬픈 울림’을 대변하는 듯했다. 슬레이트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석탄을 뒤집어쓴 듯 시커멓게 변한 납작 지붕들이 늘어져 있었다. 빗물 누수를 막기 위한 천막이 대충 덮여 있었고, 전깃줄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위태로운 자태였다. 

이들의 정체는 을지로 공장거리에 있는 상가들이다. 다양한 업종이 밀집해 있어 과거엔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드는 곳’으로 통할 만큼 한국 산업화의 심장부 역할을 했지만, 세운상가와 비슷한 시기에 쇠락했다. 길게 뻗은 세운상가와 맞닿아 있는 이 지역엔 철공소ㆍ조명가게ㆍ인쇄소ㆍ철물점 등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간판도 없는 가건물 같은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있지만, 여전히 한국경제의 뿌리산업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는 상인들이 많다.

이 낡은 산업단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운상가처럼 도시재생을 이식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청계상가 왼쪽 건물에 걸린 현수막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체부지 없는 재개발을 결사 반대한다.” “서울시는 용산참사의 비극을 잊었는가.” 이 지역 44만㎡(약 13만3100평) 부지 대부분은 재정비촉진지구에 포함돼 있다. 잘게 쪼개진 땅 주인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수십 년간 재개발은 파행됐지만, 최근엔 사업시행 인가를 받는 지구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역사와 문화가 있다더니…

세운상가를 내려와 인근 세운3구역에서 조명가게를 운영하는 부부의 한탄을 들었다. “재개발 얘기야 10년 전부터 있었지요. 청계천 복원사업 때도 밀려나갈 뻔했는데, 아득바득 버텼습니다. 이곳이 저희 터전인 걸요. 그런데 지난해부터 슬금슬금 가게를 나가란 압박이 들어오더니, 당장 올해 9월에 짐을 빼래요. 이유를 물어보니 우리 상가가 이 지역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부를 포함한 세운3구역 상인들의 보금자리엔 총 2326가구 규모의 주상복합아파트가 내년 하반기 중 들어설 예정이다. 세운상가를 둘러싸고 대형호텔ㆍ사무실ㆍ오피스텔 등 상업시설이 계획돼 있다. 

인근 공인중개사는 “세운상가 도시재생 사업 전후로 상가 내 점포 몸값이 두 배가량 뛰자 주변 땅 소유주들이 자극을 받았다”면서 “지지부진하던 재개발에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여기 있는 상인들은 대체부지도 없이 밀려나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세운상가 상인들이 수혜를 누리는 것도 아니다. 청년 사업자들과 기술형 창업자는 수혜를 누릴지 모르지만 이곳엔 ‘영세 상인’들도 많다. 한 상인이 토로했다. “기술 있는 상인들은 시에서 밀어 주는 만큼 살림살이가 나아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운상가엔 기술 장인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전자제품을 단순 유통하는 상인들이 훨씬 많아요. 오락기기, 노래방기기 등 사양길로 접어든 제품을 취급하는 업체도 숱합니다. 이들이 청년 창업가들과 무슨 시너지를 낼 수 있겠어요. 그저 임대료가 오르는 소리에 한숨만 쉴 뿐입니다.”

세운상가 도시재생 사업을 조율하는 강원재 세운공공 소장도 어려움을 토로했다. “재생은 결국 변화다. 변화를 거듭할수록 이 건물에 속한 모든 구성원의 욕망이 충돌한다. 이들 모두를 만족할 솔루션을 찾는 건 어렵다. 결국 속도를 늦추는 게 관건인데, 목소리를 더 크게 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빠른 변화를 원한다.”

도시재생은 20~30년 뒤를 보는 사업이다.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진행해서다. 만약 세운상가 도시재생 사업이 완료되고, 이 일대 재개발이 끝나 빌딩숲이 돼도 세운상가 재생 플랜은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한 청년 창업가는 “그때쯤이면 기존 상인들도 다 나가고, 청년 창업가들도 자본의 힘에 밀려나지 않을까”라고 털어놨다.

돌아오는 버스에선 “잘생겼다”라며 세운상가를 띄우는 광고가 들렸다. 세운상가는 정말 잘생기기만 한 걸까. 이 찝찝함을 극복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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