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신 국민대 교수의 브랜드 역사학

21세기 브랜드의 힘은 ‘자본’에서 나온다. 돈만 있으면 No Brand를 외쳐도 ‘브랜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창고에서 만들어진 애플ㆍ구글 같은 브랜드를 왜 너희 청년들은 못 만드냐”는 질문은 바보 같다. 그럼에도 창업가는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론칭해야 한다.  조현신(58) 국민대 교수는 “과거에서 미래의 브랜드를 찾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브랜드를 ‘타임 슬립(Time Slip)’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거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조현신 교수를 만났다.  

조현신 교수는 “우리가 놓쳤던 것들을 다시 돌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사진=천막사진관]
조현신 교수는 “우리가 놓쳤던 것들을 다시 돌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사진=천막사진관]

✚ 한국 브랜드 역사가 궁금하다. 언제 브랜드가 처음 등장했나.
“한국 브랜드의 시초는 일제강점기 때 등장한 ‘○○상회’들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일본이 상표령令을 공표하자, 브랜드를 내걸고 알리는 게 중요해졌을 것이다. 그때부터 이름 없는 물건을 내다 팔던 상인들이 거대한 간판을 내걸고 가게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제품의 대량생산과 전국 단위 판매가 가능해지면서 브랜드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한국의 브랜드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

브랜드는 귀족의 유산이다. 서구 계급사회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나타내던 상징 기호가 지금의 브랜드다. 영국의 장미전쟁(1455~1485년) 때, 왕권을 두고 다툰 두 가문의 문장紋章(흰장미와 붉은장미)도 지금으로 따지면 브랜드다. 귀족의 전유물이던 브랜드가 상업적으로 이용된 건 2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산업혁명 이후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부르주아는 물건을 팔고 홍보하는 데 브랜드를 활용했다. 이게 오늘날 상업적 브랜드로 발전했다.

부르주아는 왕실ㆍ귀족문화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왕실의 문화이던 ‘에티켓’은 부르주아의 ‘에티켓’이 됐고, 귀족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디자인 문화도 부르주아가 계승했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서구에서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때, 문호門戶를 걸어잠그고 버티던 조선은 일본의 침탈을 당했다. 그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조선의 계급은 무너져갔지만, 양반이 지닌 문화는 제대로 전승되지 못했다. 나라를 망친 계급의 문화는 옹호되거나 사랑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부르주아는 형성되지 않았다.

조선의 양반과 부자富者는 일본의 기득권이 됐고, 조선의 상인은 늘 그렇듯 천대받았다. 그런 조선인들에게(양반이든 부자든 상인이든) 개화開花를 먼저 꾀한 일본은 월등했고, 자신들은 열등했을 것이다. 초기 한국 브랜드 중 상당수가 일본풍을 모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본은 조선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조선의 문화적 열등감이 서구西歐에도 이어졌다는 점이다.

✚ 한국 브랜드는 모방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시대적 상황 때문인가?
“시대적인 영향이 크다. 세계적으로도 브랜드는 산업화 시대에 본격 등장한다. 그런데 한국은 산업화가 시작된 근대화 시기에 일본의 침략을 당했다. 일본으로부터 급격하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무의식 중에 우리 문화는 열등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핍박 받는 우리 문화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서구 문화를 선망하면서, 모방이 성행했다.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과 빨리 성장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모방품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전통문화를 향유했던 양반층이 해외문물에 젖어들었다는 점이다. 문화는 삶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삶의 모양이기도 하다. 당대의 시간ㆍ자본ㆍ노동력이 만들어낸 삶의 무늬인 셈이다. 하지만 양반층은 자신들이 지닌 수많은 문화적 양식을 버리고 서구적인 것을 좇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방의 시초가 됐다고 볼 수 있다.

✚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라면이다. 한국 최초의 라면도 일본 제품을 모방했다.
“한국 최초의 라면은 일본 묘조식품의 기술과 한국 정부의 보조금을 지원 받아 개발된 삼양라면이다.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은 일본 ‘치킨라면’을 그대로 따왔다. 그래서 라면봉지에 ‘닭’을 그려넣은 모양이다. 봉지는 독특했다. 닭의 통통한 몸통 부분을 통해 면이 들여다보이는 방식이었다. 압축적 경제성장이 필요했던 한국인의 압축 끼니가 라면이었던 셈이다.”

일본을 모방하던 브랜드들은 점차 서양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브랜드 로고에 영문을 삽입하거나 제품명을 영어ㆍ프랑스어로 짓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났다. 서구문화를 동경하며 모방의 고리를 이어간 셈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은 우리의 문화적 자존감이 낮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현신 교수는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문화적 자존감을 드러낸 사례를 소개했다. “글로벌 브랜드 코카콜라를 표기하는 방법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중국의 경우, 외래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중국 방식으로 해석한다. 코카콜라의 뜻과 소리를 살려 可口可樂(가구가락ㆍ입이 즐거운)이라고 적는 이유다. 한국은 영어를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받아 적는다. 브랜드는 이처럼 시대상뿐만 아니라 역사성과 정체성도 보여준다.”

진정한 부르주아 없었던 조선

✚ 브랜드가 변해온 과정을 통해 시대상을 확인할 수 있을까.
“크게 세시대로 나눠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1960년대에는 어설픈 모방이 제품이나 브랜드에서 드러난다. 서구를 좇아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우리 고유의 감성과 문화가 묘하게 섞이던 시기다. 1970년대 경제개발기에는 경제 발전에서 오는 자신감이 브랜드에서도 나타난다. 브랜드의 상표나 로고가 더욱 화려해지고, 외국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반면 작고 소소한 우리 고유의 미감은 점차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경제호황기에는 브랜드에 건강ㆍ웰빙ㆍ슬로 라이프 등의 가치를 담기 시작했다.”

✚ 조금은 추상적인 듯하다. 예를 들어줬으면 한다.
“근대의 식기류에는 작고 소박한 한국의 꽃무늬가 많았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서구의 기하학적 무늬나 장미ㆍ백합 등 서구의 화려한 꽃 문양이 등장한다. 이건 한국 조경 문화의 변화와 일치한다. 붓꽃ㆍ채송화ㆍ금잔디 같은 한국의 꽃이 사라지고, 펜지ㆍ달리아ㆍ글라디올러스 등 외래종이 우리의 조경을 바꿔놨던 시기다. 또 ‘백조’나 ‘늘봄’ 등 한글 제품명은 ‘킹’ ‘솔로몬’ 등 영어에서 ‘뺑때미어’ ‘루블레르’ 등 프랑스어로 변화한다. 급격한 산업화와 서양문화를 동경하는 시대상이 담긴 셈이다.

✚ 브랜드를 보면 우리의 삶이 보이는 듯하다.
“브랜드에는 시대의 욕망과 미감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 브랜드가 시대의 욕망과 미감을 담았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해외 브랜드에 열광하는 경향이 강하다. 명품에 열광하거나 유행에 민감한 것도 같은 맥락 아니겠는가.
“우리가 달려온 길을 되짚어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일제의 식민통치, 한국전쟁, 독재정권을 거쳤다. 198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는 부흥했지만 취향이나 문화적 감각을 키울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제품을 선택할 때 브랜드를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요인은 전통 유교사상에서 이어져온 동조문화가 강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집단에 속하고 싶은 심리가 브랜드 선호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이끌어가는 세대가 등장한 건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

한국 브랜드는 모방의 시대를 지나 다양성의 시대를 맞았다.[사진=연합뉴스]
한국 브랜드는 모방의 시대를 지나 다양성의 시대를 맞았다.[사진=연합뉴스]

그래, 누가 뭐라 해도 지금은 다양성의 시대다. 사람들은 개성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때론 가성비ㆍ가심비가 브랜드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에 다른 문제가 잉태됐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브랜드를 ‘자본’이 잠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숱하게 많은 브랜드가 등장하지만 대기업 브랜드의 힘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오죽하면 ‘브랜드가 없다’면서 대기업들이 내놓은 ‘No brand’가 공전의 히트를 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브랜드에 시대의 욕망과 미감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브랜드는 ‘자본’만을 품었다는 게 솔직한 답이 아닐까.

✚ 다양성의 시대가 됐다. 창업이 증가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브랜드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기존 대기업 브랜드의 시장 장악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대 아닌가. 자본이 마스터(Master)가 되는 사회다. 최고의 창의성, 노동력, 기술력이 자본으로 몰린다. 실제로 인지도 높은 대부분의 브랜드가 거대 자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다라면 인간의 역사는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지닌 창의성, 열정, 모험정신으로 자본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고 본다.

✚ 브랜드가 양극화를 부추기는 듯하다.
“애초부터 브랜드는 인간의 ‘구별 짓기’ 욕망을 먹고 자랐다. 계급이 사라진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익명의 도시에서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브랜드’인 셈이다. 내가 입는 옷, 내가 타는 차가 나를 증명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지 않고 내가 입은 옷이 어떤 브랜드인지를 본다. 그 옷을 살 수 있는 경제력이 내게 있다는 것이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다.”
물론 무에서 유를 창조한 브랜드도 많다. 구글, 애플 등 글로벌 IT기업들은 자본이 없는 개라지(Garageㆍ차고)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세계 100대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브랜드가 범람하는 시대, 창업을 꿈꾸거나 실제로 창업을 한 사람들에게 쏟아질 만한 ‘한줄기 희망’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브랜드가 추상적인 만큼 브랜드 전략을 날카롭게 짤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과거에 새로운 것이 있다

✚ 어떻게 브랜드 전략을 짜야 할까?

“기술이나 기능성은 평준화했다. 이제 성패를 가르는 건 창의성이다. 시대적 가치를 관통하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

✚ 어떻게 시대의 가치를 읽어낼 수 있을까.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빅데이터를 통해 사람들의 감각과 취향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브랜드 전략을 짤 때에는 빅데이터 속의 큰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사람들의 감각이나 취향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유엔미래포럼은 ‘고령화’ ‘기후변화’ ‘건강ㆍ복지’ ‘개인화’ ‘바이오혁명’ 등 10가지를 메가 트렌드(Mega trend)로 꼽았다. 시대의 큰 물줄기가 환경과 자연으로 향하고 있다는 거다. 메가 트렌드적인 관점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해야 한다.”

✚ 요즘 아날로그적인 제품이 젊은층에 인기를 끄는 이유도 그런 맥락인가.
“우리의 몸은 아날로그다. 우리는 물질로 이뤄졌고, 물질이 요구하는 게 아날로그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단 것 쓴 것을 체험하고 싶고, 물질성을 느끼고 싶어 한다. 전자책이 발전해도 책의 질감, 무게감, 냄새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나. 결국 사람은 아날로그를 벗어날 수 없다. 최근 아날로그 색을 띤 ‘코리아 빈티지’가 젊은층에 각광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촌스럽고 어설프지만 우리의 정감이 묻어나는 제품에 젊은층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거다.”

✚ 브랜드들이 아날로그 색을 입으면 차별화를 쉽게 꾀할 수 있을 듯하다.
“낡고 오랜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것을 좇아왔다. 하지만 미래는 새롭지만 불안한 곳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 못지않게 고여 있는 것, 정감 있고, 시간이 축적되어 있는 우리 것을 그리워한다. 그동안 스스로 폐기하고 값어치 없다고 여겼던 것들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아쉽게도 지금 국내 브랜드에서는 우리 고유의 미감이나 정서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과거의 것에서 차별화 포인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과거 진로 소주 상표에는 득의양양한 두꺼비가 등장했다. 우리 설화와 민담 속에서 여우를 꾸짖고, 콩쥐를 돕던 두꺼비다. 이렇게 한국인이 정서적으로 선호하는 두꺼비를 그려 넣고 진로는 대표 소주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브랜드의 과거를 살펴보면 그 시기에 왜 그 브랜드가 통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과거를 반추하면 미래의 브랜드를 상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 마지막으로 창업가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과거를 너무 무겁거나 의미로 꽉 찬 것으로 보지 말자. 호기심으로 바라보자. 낯익지만 신기하고 진귀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안목으로 과거의 정감과 미감을 브랜드로 형상화해야 한다. 과거의 창고에서 ‘새로운 과거’를 발견하는 혜안이 있기를 바란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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