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라면봉지 ‘무거운 시대’ 담았네
하찮은 라면봉지 ‘무거운 시대’ 담았네
  • 이지원 기자
  • 호수 300
  • 승인 2018.08.0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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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역사학적 고찰

1942년 론칭된 ‘행남자기’에 영문(MADE IN KOREA)이 들어간 건 수출이 활성화하던 1960년대다. 공교롭게도 원숭이를 심벌로 삼았던 진로를 영문(JINRO)으로 표기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80년대 빨간색이었던 라면봉지의 색깔이 ‘검정 계열’로 바뀐 건 무한경쟁과 자유시장경제의 위력이 확산하던 2000년대였다. 브랜드는 허영과 탐욕을 자극하는 도구가 아니다. 거기엔 시대상과 삶이 담겨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브랜드에 숨은 역사적 함의를 취재했다. 

브랜드는 시대의 욕망과 정서를 반영한다.[사진=연합뉴스]
브랜드는 시대의 욕망과 정서를 반영한다.[사진=연합뉴스]

식기 브랜드 행남자기의 심벌이 변해온 과정을 보면, 한국인의 취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이 회사는 1942년 전라남도 목포에 설립됐다. ‘행남杏南(남쪽에서 잘 자라는 살구나무)’이라는 사명대로 살구꽃을 본떠 심벌을 만들었다. 초기 행남자기의 심벌은 꽃 모양이 기하학적인데, 일제강점기의 보편적인 디자인이었다.

수출이 증가한 1960년대에는 심벌에 영문 ‘MADE IN KOREA’가 등장한다. 해외로 뻗어나가던 이 시기의 한국기업 상당수는 로고에 영문을 삽입했다.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한 1980년대에는 부의 상징인 ‘왕관’을 심벌에 추가했다. 높아진 위상과 자신감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1990년대에는 꽃 모양 대신 영문 이니셜 ‘H’를 채택했다. 수출이 감소하고, 국내 시장이 확대하던 시기인데도 영문 이니셜을 심벌로 택한 건 서구적인 것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서민의 삶을 상징하는 소주는 어떨까. 대표적인 소주 브랜드 ‘진로’는 1920년대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른다. 1924년 평안남도 용강군에 설립한 진천양조상회에서 시작한 진로소주의 초창기 상표에는 원숭이 두마리가 등장한다. 북한에서는 원숭이가 말을 이해하고, 술을 즐기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진=글항아리 제공]
[사진=글항아리 제공]

1950년대 전국 판매를 시작하면서 원숭이 대신 두꺼비가 심벌이 됐다. 남한에선 원숭이가 교활함과 속임수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반면 두꺼비는 ‘콩쥐를 돕고’ ‘은혜를 갚는’ 동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설화와 민담이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였던 셈이다. 1960년대에는 소주에도 영문 이름 ‘JINRO’가 첫 등장한다. 1980년대에는 풍요를 상징하는 금색 배경과 곡식 문양이 상표의 주를 이뤘다. 1990년대 환경ㆍ건강 문제가 대두되면서 소주 상표에도 청정함을 표현한 대나무와 이슬이 강조됐다. 그 사이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모양이 단순해진 두꺼비는 민담과 전설이 사라지는 과정을 증명한다.

[사진=글항아리 제공]
[사진=글항아리 제공]

소주와 쌍벽을 이루는 인스턴트 음식 라면의 변천사도 흥미롭다. 최초의 라면 봉지에는 닭이 등장한다. 일본의 치킨라면에서 따온 디자인이다. 지금과 달리 배고프던 시절에는 라면에 ‘영양’이라는 가치까지 담겼던 거다. 1970년대 라면 포장은 주황색이 주를 이뤘다. 대중적이고 편안한 색감인 데다, 한국의 ‘탕 요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빨간색 포장이 많았다. 시장을 개방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자극과 열정의 색 빨강이 각광받았던 거다. 2010년대에 등장한 검은색 포장에는 힘을 향한 심리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검은색은 일반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겁고 강하다는 점에서 현대성을 상징한다.

이후 흰색이나 노란색 포장에선 값싸고 영양가 없는 라면의 인식을 바꾸려는 기업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웰빙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 데다 주요 라면 소비층인 10~20대가 감소하면서 라면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 셈이다. 자극 없는 부드러운 맛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사진=글항아리 제공]
[사진=글항아리 제공]

정리 =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도움 = 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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