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올드보이 ❽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기억’이 야기하는 비극적 사건의 보고서와 같다. 기억이란 컴퓨터 정보처리(information processing) 과정과 동일하다. 하나의 사건은 기억할 만한 일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에 따라 ‘분류’되고 ‘저장’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저장된 기억들이 ‘소환’되고 다시 ‘재생’된다.

같은 정보를 접해도 모두의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같은 정보를 접해도 모두의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우리가 경험한 일들이 모두 저장되지는 않는다. 불필요한 정보라고 판단하면 저장되지 않는다. 저장돼도 엉뚱한 파일에 저장시켜 놓으면 필요할 때 찾을 수도 없다. 동일한 정보를 접해도 모두의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고등학생 이우진(유지태)은 누이와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오대수(최민식)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하고 친한 친구에게 속삭인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진다. 누이는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전학을 가버린 오대수의 기억 속에 이우진의 ‘근친상간’과 그 누이의 ‘자살’이라는 정보는 저장조차 되지 않았다.

사설감옥에 갇혀 15년간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자신이 그런 봉변을 당할 만큼 남에게 원한 살 일을 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같은 사건이 이우진의 기억 속에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의 파일에 간직돼 있다. 그와 관련된 무수한 연관어나 장소, 시간만 접해도 저장된 기억은 소환되고 재생돼 분노와 복수심에 치를 떨게 한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정보처리가 빚어내는 ‘기억의 비극’이 시작된다. ‘때린 놈’은 잊지만 ‘맞은 놈’은 잊지 못한다. ‘맞은 놈’은 보복당할 일 없으니 두발 뻗고 잘 수 있지만, ‘때린 놈’은 두발 뻗고 자면 안 되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내가 누군가를 때렸다는 ‘정보’를 정확히 머릿속에 입력해 저장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올드보이’에서 ‘때린 놈’인 오대수는 어이없게도 발 뻗고 살고 있었고, 맞은 놈인 이우진에게 결국 걸려든다. ‘기억’의 불일치가 빚어낸 비극이다.

오대수가 까맣게 잊고 산 일이 이우진의 기억 속엔 원한으로 간직돼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오대수가 까맣게 잊고 산 일이 이우진의 기억 속엔 원한으로 간직돼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결국 오대수는 자신이 3살 때 헤어져 15년 만에 상봉하게 된 딸과 ‘근친상간’을 범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우진이 완성한 복수는 그렇게 죽음보다 가혹하다. 이우진 발아래 엎드려 개처럼 그의 발을 핥고, 자기 손으로 ‘죄 많은’ 자신의 혀를 가위로 잘라냄으로써 딸에게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리는 최악의 형벌만은 피했지만 오대수는 딸과의 ‘근친상간’의 기억을 안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

자신이 딸과 근친상간을 하도록 최면을 걸었던 최면술사에게 탄원서를 보내 자신이 딸과 성관계를 가진 ‘기억’을 지워달라고 한다. 최면술사는 그의 탄원을 수용하고 그 기억을 지우는 간단한 작업을 해준다.

오대수와 딸은 아무도 없는 산속으로 들어가 산다. 눈 내리는 숲속에서 딸은 오대수의 시린 손을 호호 불어주고, 목에 자신의 털목도리를 둘러준다. 오대수는 웃다가 운다. 15년간 갇혔던 감옥 벽에 붙어있던 ‘웃어라 세상 사람들이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는 글귀가 적힌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괴한 그림처럼 웃다가 운다. 아마도 최면술사의 ‘기억 제거’ 작업이 썩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듯싶다. 그 기억이 지워진 척하고 살아가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박정희 동상’과 ‘박정희 기념관’을 둘러싼 갈등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박정희 동상’과 ‘박정희 기념관’을 둘러싼 갈등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올드보이’가 보여주는 기억의 비극은 단지 개인들 사이에서만 발생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기억’이나 ‘집단 기억’은 세대별ㆍ계층별ㆍ지역별ㆍ성별 모두 다르게 분류되고, 저장되고, 또 재생된다.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해서 버린 기억들이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저장해 두고 끊임없이 재생해야만 할 기억이다. 누군가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다. 오대수처럼 아무리 지우려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불행한 사회적 기억들도 있다.

‘박정희 동상’과 ‘박정희 기념관’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프랑스의 역사가 피에르 노라(Pierre Nora)가 기획한 저작물 ‘기억의 장소(Les Lieux de memoire)’는 ‘집단 기억’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사회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는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다.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를 기억해야 할 것인지, 기억해야 한다면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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