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시민 케인 ❶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도덕감정 이론(Theory of Moral Sentiments)’에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시민’을 정의한다. “공동체의 법과 규정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시민이 아니다. 또한 공동체 전체의 복지와 다른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자는 좋은 시민이 아니다.”

‘시민 케인’은 현대영화 100년사에서 최고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 명작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시민 케인’은 현대영화 100년사에서 최고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 명작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오손 웰스(Orson Welles)가 감독과 주연을 도맡은 1941년작 ‘시민 케인(Citizen Kane)’은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명작 중하나다. 영화 관련 매체나 기관들이 지난 100년간 개봉된 영화 중 100편의 영화를 선정할 때 정상의 자리를 놓치는 법이 없다. 1등의 기록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지만 ‘시민 케인’은 이 법칙마저도 비웃는 듯하다.

오손 웰스는 그 이름 앞에 붙일 호칭이 딱히 마땅치 않다. 그는 영화 배우ㆍ연극 배우ㆍ영화 제작자ㆍ감독ㆍ극작가ㆍ성우까지 온갖 영역을 넘나들며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그야말로 다빈치 같은 인물이다. 오손 웰스가 활동했던 무수한 영역 중 2개의 영역에서 남긴 기록할 만한 영화가 바로 ‘시민 케인’이다.

80년 전 제작된 영화가 여전히 현대영화 100년사에서 최고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이, 오손 웰스라는 100년에 한명 날까 말까 한 천재성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 감독들이 신통치 않아선지 이유도 애매하다. 다만, 1941년도 영화임에도 19 60년대나 1970년대 혹은 1980년대 영화에서 풍기는 촌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마치 현대적 시각에서 바라봐도 세련된 조선시대 고가구나 장신구를 대하는 느낌이다.

영화는 요즘은 흔히 사용되지만 당시엔 거의 혁명적으로 느껴졌을 법한 ‘플래시 백(flash-back)’ 기법을 동원한다. 미국의 언론 재벌 찰스 포스터 케인(Charles Fos ter Kane)이 부와 영향력을 상징이라도 하듯 제왕의 궁전과 같은 자신의 플로리다 대저택 재너두(Xanado)에서 숨을 거둔다. 재너두는 원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의 궁전 이름 ‘샹두(Shang-duㆍ上都)’에서 유래하는 부와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이다.

시민으로서 법과 규정만 준수하면 ‘까방권’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을까.[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시민으로서 법과 규정만 준수하면 ‘까방권’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을까.[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표류 끝에 13세기 원 제국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머물렀던 마르코 폴로가 유럽으로 돌아와 전한 쿠빌라이 칸의 궁전 ‘샹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와 화려함은 이내 유럽인들에게 부와 권력의 상징처럼 자리잡는다. 그것이 유럽을 넘어 신대륙 미국의 신흥재벌의 대저택 이름이 된 것이다. 자신의 저택에 붙인 ‘재너두’라는 이름에 케인이라는 언론 재벌의 야망과 오만함이 집약된다.

케인은 자신이 소유한 신문을 통해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을 공격하고 쓰러뜨린다. 그의 신문은 전형적인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의 길을 걷는다. 대중의 여론도 자신의 이익과 입맛에 따라 조작하고, 마침내 미국의 국내 정치와 외교 정책까지 좌지우지한다. 그리고 그의 야망은 마침내 미국 대통령의 권한에 맞먹는다는 뉴욕 주지사 자리까지 넘본다.

케인의 야망 가득한 질주가 순탄하지만은 않는다. 수많은 질시와, 의혹 그리고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 때마다 케인은 “나는 지금까지 미국의 시민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미국의 시민이며, 앞으로도 미국의 시민으로 살 것”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케인이 말하는 ‘시민’의 의미는 그저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의미는 물론 아니다. 수동적인 통치의 대상인 ‘국민’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좋은 시민’을 찾기가 어렵다.[사진=연합뉴스]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좋은 시민’을 찾기가 어렵다.[사진=연합뉴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 이론’에서 “공동체의 법과 규정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시민이 아니다. 또한 공동체 전체의 복지와 다른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자는 좋은 시민이 아니다”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시민을 정의한다. 케인의 열변은 애덤 스미스의 시민론에 입각해 해석하면 결국 자신이 혹시 전체 미국 국가의 복지 향상과 다른 시민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좋은 시민’은 아닐지 모르지만 미국 사회의 모든 법과 규정을 존중하고 지켜왔다는 말이 될 듯하다.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범법, 위법, 탈법이 아니어도 기술적으로 법을 피해갈 길은 얼마든지 있다. 어쩌면 “나를 비난하는 너희들 중에 정말 ‘좋은 시민’이 있거든 돌을 들어 나를 쳐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민권을 가진 시민은 많다. 법과 규정을 지키는 시민도 많다. 그러나 ‘좋은 시민’은 많지 않다. 우리 사회에 진정 필요한 것은 좋은 시민일 텐데 그 좋은 시민은 찾기 어렵다. 케인의 항변처럼 법과 규정을 존중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까방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한 까방권을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오손 웰스가 영화 제목을 ‘시민 케인’으로 명하고 1940년대 미국 시민들에게 던진 무거운 질문인 듯하다. 물론 지금, 2018년 한국 시민들에게도 똑같이 무거운 질문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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