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디지털

패션의 봉제작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자동봉제기계가 출현하는 데까진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패션산업이 ‘정통’만을 고집해도 괜찮다는 건 아니다. 지금은 엄연히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 디지털 툴이 모든 걸 바꿔놓는 혁명기다. 패션산업 역시 이 시대에 적응하면서 ‘팔색조 변신’을 꾀해야 한다. 패션산업은 아날로그의 전유물이 아니다. 

패션업계도 디지털 컨버전스를 대비해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패션업계도 디지털 컨버전스를 대비해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인류 문명의 모든 분야에서 디지털 컨버전스(Digital Convergence)가 일어나고 있다. 종이문서가 전자문서로 바뀌고, 필름 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로 바뀌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워드프로세서의 보급으로 모든 사람은 출판인이 됐고, 인터넷 홈페이지의 출현으로 모든 사람은 언론인이 됐다. MIDI (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를 이용한 디지털 음악 덕분에 모든 사람은 작곡가나 프로듀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쓰면 누구든 사진작가나 영화감독의 꿈을 이루는 게 가능하다. 한발 더 나아가 3D 프린터와 인내심만 있다면 누구든 원하는 물건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패션 분야에선 ‘디지털 컨버전스’가 진행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패션의 정체성부터 찾아보자.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공상과학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요소들이 있다. 날아다니는 자동차(당연히 자율비행), 타임머신, 순간이동장치, 초광속 우주선, 범지구적 단일 정부, 식사대용 알약 등이다. 이중에는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들도 있지만 수십년~수백년 내에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게 하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옷, 심지어 착용자의 체형을 무시한 타이즈 같은 점프슈트를 입게 될 것이라는 상상이다. 지난 긴 세월 동안 옷이 심미적ㆍ기능적ㆍ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리한 상상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같은 옷을 입는 영화가 계속 나오는 것은 극도의 산업화로 인간성과 개성이 말살된 ‘디스토피아(Dystopia)적 사회’를 묘사하기 위한 장치 때문으로 풀이된다. 반대로 개성을 가장 쉽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옷’이라는 얘기도 된다. 

이처럼 개성을 표현하는데 기본이 되는 패션 분야는 ‘프로슈머(ProsumerㆍProducer+Consumerㆍ제품 생산부터 유통까지 직접 참여하는 소비자)’의 최고의 놀이터다. 모든 사람이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건 어렵겠지만 패턴사나 재단사는 가능하다. 현재 기술로도 개인별 옷본을 자동으로 만들 수 있다. 3D 그래픽을 활용하면 봉제된 옷의 모양을 미리 보는 것도 가능하다.

다품종 소량생산 필요해

문제는 자동봉제기계를 만드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봉제 공정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성격의 일도 아니다. 대중화된 자동봉제기계가 개발되는 게 쉽지 않은 이유다. 그래서 자동봉제기계가 생산될 때까지 프로슈머들의 다양한 니즈를 충족해 주려면 옷을 수천벌씩 만드는 공정을 넘어 한벌씩 주문받은 옷을 만들 수 있는 공정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까지나 엔지니어 중심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디자인해서 만든 옷을 별로 입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디지털 컨버전스로 무장한 프로슈머들이 패션 분야를 좌우할 것이기 때문에 업계도 대비해야 한다. 

 

​​​​​​천하를 호령하던 2G폰이 스마트폰의 등장에 속절없이 무너진 것처럼, 엄청난 자본이 투자된 대량 의복생산체제도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 진화하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시장에서 밀려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패션산업 종사자들은 특유의 높은 안목 때문에 현재의 기술 수준을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패션분야 디지털 컨버전스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지레 단정하는 건 곤란하다. 

처음 CAD(Computer Aided Design)나 워드프로세서가 나왔을 때는 기능이 너무나 빈약해서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글씨를 쓰고 도면을 그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설계를 하고, 문서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지 않았는가.

또 다른 우려를 내비치는 사람들도 숱하다. 자동차가 보급될 때 마부들이 일자리를 잃었듯 디지털 컨버전스가 패턴사나 재단사의 직장을 뺏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직한 마부가 운전사가 된 것처럼, 옷을 만드는 일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들도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툴을 부여받을 것이다.

혼자서도 이미 잘나가고 있는 IT분야나 로봇분야에 패션산업의 미래를 책임져 달라고 의지할 수만은 없다. 패션산업계 내부에서 스스로 디지털 컨버전스를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김성민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 sungmin0922@snu.ac.kr│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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