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시민 케인 ❷

‘가진 자(Noblesse)’는 일반 시민과는 차별화되는 ‘도덕적 책무(Oblige)’를 요구받는다.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시민 케인’의 주인공도 언론재벌로서 당연히 남다른 도덕적 책무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향력과 권리는 최대한 누리면서도 의무는 최소화한다.
 

시민에게는 그저 그런 죄도 노블레스에겐 죽을 죄가 될 수 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시민에게는 그저 그런 죄도 노블레스에겐 죽을 죄가 될 수 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거대 언론사를 운영하며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 케인은 원 제국 쿠빌라이 황제의 궁궐 같은 ‘재나두(Xanadu)’에 산다. 그는 자신의 부의 축적 과정에 제기되는 온갖 의혹과 비난을 “나는 지금까지 미국 시민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미국의 시민이며, 앞으로도 미국의 시민으로 살 것”이라는 말로 대응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숱한 의혹을 제기하지만 한번도 유죄로 판명된 적이 없다’는 말을 깨나 멋지게 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죄와 벌은 별개의 문제다. 나라를 말아먹는 죄를 지었는데 처벌을 안 받기도 하고, 빵 한 조각을 훔쳐 10년을 감옥에서 썩기도 한다. 경제사범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 빼도 박도 못 하는 현행범인 경우가 드물다.

‘있는 자’들의 범행은 대개 심증은 가나 물증은 없다. 물증이 있어도 최고의 ‘법 기술자’들로 최강의 변호인단을 구성해 온갖 법리를 총동원해 빠져나간다. 아내를 죽인 미국의 억만장자 스포츠 스타 오 제이 심슨(O.J. Sim pson)이 차고 넘치는 살인의 물증에도 무죄평결을 이끌어내는 진기명기를 연출하는 곳이 미국 사회다. 언론재벌 케인 회장님에게 쇠고랑 채우기는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기보다 어려운 일인 것이다. 케인이야말로 유전무죄有錢無罪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

영국의 저명한 법학자 H.L.A Hart는 ‘법이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명제를 남긴다. 모든 법을 준수했다고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도덕성이 ‘좋은 시민(Good Citizen)’의 조건이라면 케인은 결코 ‘좋은시민’ 칭호를 넘보기는 무망하다. 그저 ‘시민’이라는 칭호가 그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대치다.

 

언론재벌 케인은 유전무죄有錢無罪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언론재벌 케인은 유전무죄有錢無罪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미국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언론재벌 회장님에게 좋은 시민이 아닌 그저 시민이라는 칭호밖에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은 1940년대 미국 사회의 불행이다. 오손 웰스 감독은 영향력은 있지만 좋은 시민은 아닌 많은 가진 자들이 미국을 1930년대의 궤멸적 경제 파탄으로 몰고 간 주범이라는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가진 자(Noblesse)’는 일반 시민과는 차별화되는 ‘도덕적 책무(Oblige)’를 요구받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당연히 언론재벌 케인도 남다른 도덕적 책무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케인은 언론재벌로서 자신의 영향력과 권리는 최대한 발휘하고 누리면서도 자신의 의무는 일반 시민의 그것과 똑같이 최소화한다. 의무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시민 케인인 것이다. 재벌 회장님이 건강보험료를 100만원 월급쟁이와 똑같이 내겠다는 꼴이다.

많은 재벌 총수라는 대한민국의 노블레스들, 국회의원 장차관이라는 노블레스들, 그리고 무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어마어마한 노블레스들까지 법정에서 시정잡배들처럼 법리를 다투느라 여념이 없다. 그들이 혹시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이끌어낸다고 해도 그들에게 ‘노블레스’의 지위가 유지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유력 정치인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법정으로 끌고 가서 혹시 무죄판결을 끌어낸다면 ‘시민’이 될 수는 있겠지만 ‘노블레스’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저 ‘시민’이라면 목숨을 던질 필요까지 없겠지만 그가 ‘노블레스’라면 그것이 그야말로 ‘죽을 죄’가 될 수도 있다. 시민이 아니라 노블레스이기에 역차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의 모습들이 민망하고 보기 불편하다.[사진=뉴시스]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의 모습들이 민망하고 보기 불편하다.[사진=뉴시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까마득한 고대 그리스 호머(Hom er)의 서사시 ‘일리아드(Illiard)’ 에서다. 트로이 전쟁의 장군들은 전쟁에 나서면 장군인 자신들이 일반 병사들보다 더 앞에 서서 먼저 죽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노블레스의 역차별이다. 그런 불이익이나 역차별이 억울하다면 장군이 되지 말아야 한다.

‘노블레스’ 케인이 ‘시민 케인’이어서는 안 되듯이, 전직 ‘대통령 이명박’이 ‘시민 이명박’이어서는 안 된다.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의 모습들이 민망하고 보기에 불편하다. 대재벌 케인이 그 의무에 있어서는 일반 시민처럼 구는 1940년대 미국 사회가 불행했다면,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서 일반 시민처럼 구는 2018년 대한민국도 불행하긴 마찬가지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