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회 vs 편의점 상비약 논쟁

휴일 혹은 심야시간,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덜컥 겁이 난다. 그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생긴 게 바로 ‘상비약 판매제도’다. 24시간 편의점에서 일부 상비약을 판매하는 근거가 바로 이 제도다. 하지만 품목이 한정돼 있다 보니 종류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문제는 “확대해야 한다” “그래선 안 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번에도 ‘강 건너 약 구경’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약사회와 편의점의 상비약 논쟁을 취재했다. 

편의점 상비약 판매 확대를 두고 약사회와 편의점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편의점 상비약 판매 확대를 두고 약사회와 편의점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정인숙(가명ㆍ40)씨는 최근 여름휴가를 맞아 남편, 자녀 둘과 함께 1박2일 일정으로 물놀이를 다녀왔다. 오랜만의 가족여행이었지만 들뜬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초등학생인 첫째가 두통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이마를 짚어보니 미열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지가 작은 시골마을이다 보니 근처에 약국 하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펜션 주인에게 물어보니 “바로 옆에 24시간 편의점이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했다.

다행히 편의점엔 어린이용 타이레놀이 있었다. 아이는 약을 먹고 잠이 들었고, 정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엔 집근처에 약국이 있어서 별 걱정이 없는데, 낯선 곳에 갔을 때 약국이 없으면 난감하다”는 정씨는 “급할 때 편의점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2012년 5월 2일 상비약을 약국이 아닌 장소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그해 11월 15일 ‘상비약 판매제도’가 시행됐다. 해열진통제(5개), 감기약(2개), 소화제(4개), 파스류(2개) 13개 품목이 편의점에서 판매된 건 이때부터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상비약이 편의점에서도 판매되면서 야간이나 휴일에 겪었던 의약품 구입 불편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제도 시행 후 병원이나 약국이 문을 닫는 시간에 편의점에서 상비약을 구입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보건복지부가 제도 시행 최초 20여일의 약국 외 상비약 판매실적을 모니터링한 결과를 보자. 시행 첫날인 11월 15일 5919개의 상비약이 편의점에서 판매됐다. 이후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늘어 12월 2일까지 약 22만4000개(누적)의 상비약이 판매됐다. 특히 일요일인 11월 18일, 11월 25일, 12월 2일의 판매량이 평일 대비 2.3배 많았다.

보건복지부의 의뢰를 받아 최상은 고려대(약학) 교수 연구팀이 실시한 ‘안전상비의약품 구입행태 및 소비자 인식조사(2016ㆍ이하 연구보고서)’에서도 상비약을 많이 구매하는 요일은 주말ㆍ공휴일이 49.9%, 시간대로는 심야시간대가 50.7%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비약을 구입하는 이유는 “공휴일ㆍ심야시간에 약이 필요해서(72.9%)” “약국보다 가까워서(22.6%)” 순이었다. 

 

약국이 문을 닫는 휴일이나 심야시간 대에 편의점에서 상비약을 구입할 수 있게 돼 편의성이 향상됐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상비약을 판매하는 당사자인 약국과 편의점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줄곧 삐걱대고 있다. 상비약 품목을 사이에 두고서다. 

“탐욕 버려라” 팽팽

애초 복지부는 상비약 판매제도 시행 6개월 후 소비자들의 안전상비의약품 사용실태 등을 중간 점검하고, 시행 1년 후 품목을 재조정하기로 했다. 그후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지난해 1월 “의견 수렴을 거쳐 6월까지 품목 조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최상은 교수 연구팀의 연구보고서에서 화상연고, 인공누액, 지사제, 알레르기약(항히스타민제) 등의 신규 추가를 고려하는 방안이 제시돼서다. 하지만 이를 두고 대한약사회와 한국편의점산업협회가 서로 “탐욕을 버리라”며 맞서고 있다.

약사회는 7월 29일 ‘국민건강 수호 약사 궐기대회’까지 개최했다. 약사회는 “의약품은 단 한건의 부작용이 발생해도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면서 “국민의 건강을 염려한다면 일선 편의점들은 의약품으로 득을 보려는 탐욕을 버리고 가맹점 자정에 노력을 기울이라”고 밝혔다.

편의점산업협회도 물러섬이 없다. ‘의약품 탐욕’이라는 약사회의 주장에 “편의점 전체 매출에서 상비약 판매가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5년 0.2% 수준으로 미미하다”면서 “약사회의 주장은 과장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편의점산업협회는 되레 “이것이야말로 약사들의 직역職域 이기주의”라고 꼬집었다. “약국이 문을 닫는 명절 연휴 기간 또는 휴일에 편의점 상비약 구매가 평일 대비 50% 이상 증가했다. 약국 외에도 상비약을 구매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약사회는 편의점 판매약 제도를 즉각 폐지하라고 주장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약사회는 편의점 판매약 제도를 즉각 폐지하라고 주장하고 있다.[사진=뉴시스]

하지만 관계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월 “품목조정에 착수한다”는 발표를 한 후 지금까지 까지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품목 조정을 위해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까지 구성하고, 제3차 심의위원회(2017년 8월)에서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제산제, 지사제, 항히스타민제, 화상연고를 추가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거기까지였다. 지난해 12월 열린 제5차 심의위원회는 약사회 정책위원장의 자해 시도로 회의 자체가 중단됐다. 

“정부의 안일한 태도가 갈등 키워”

그로부터 8개월여 만인 지난 8일 제6차 심의위원회가 열렸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제산제와 지사제 효능군의 추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와 차후 검토하기로 했고, 타이레놀(500㎎)을 제외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소비자들이 기대하던 품목 조정은 또 다음으로 미뤄졌다.

최예지 경실련 사회정책팀장은 “약사회가 약물 오남용을 우려하며 편의점 판매약 확대를 저지하는 것은 국민들의 의약품 접근성과 편리성을 가로막는 억지에 불과하다”며 “오남용이 우려된다면 상비약 포장에 복약지도를 더 쉬운 방법으로 크게 표기하라”고 꼬집었다. 최 팀장은 정부의 안일한 태도도 갈등을 키우는 원인이라고도 지적했다.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어느 한쪽 얘기만 듣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최상은 교수 역시 “약국 외 상비약 판매제도가 시행초기에 비해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있지만 안전성을 위해 더 정교한 제도 운영과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비약 품목 조정을 둘러싼 당사자들과 정부의 지루한 힘겨루기에 국민들의 편의가 또 한번 연기된 셈이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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