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회 ①

 
이순신공이 전시에 세운 공훈이 만고에 이름을 드리워 일월과 빛을 다투었으니 공은 우뚝 서서 홀로 가는 우주간의 바른 기운일지로다.

이해 신사1581년 4월에 도로 임명되어 다시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1) 이는 그 무죄함을 조정에서 알고 군기경차관이 반좌율2) 에 저촉되어 파직된 것이다. 순신의 전통箭筒은 옛날 명인의 작품으로 용과 봉을 조각한 것인데 상당한 보물이었다.

당시 우의정 유전은 고대의 유물인 골동품을 좋아하는 성벽이 있다. 그 전통이 순신에게 있음을 알고 훈련원에서 활쏘기 할 때에 유전이 찾아와서 순신을 보고 청했다.

“그대의 전통을 내가 빌리려 하노니 그대는 허락하겠는가?” 순신이 부복하며 말했다. “일개 전통은 드리기 어렵지 않습니다마는 만일에 이 전통을 주고받고 하였다는 소문이 원근에 전파된다 하오면 세인이 이르기를 대감의 받으심과 소인의 드림을 어떠하다 하오리까? 반드시 불공부정하다고 할 것이니 일개 전통으로 인연하여 대감과 소인이 다 같이 오독의 명을 받을 것이오니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유전이 그 말이 정대함을 깨닫고 도리어 무안하여 사과하되 “그대의 말이 당연하다” 하고 그냥 돌아갔다.

 
계미1583년 7월에 이용이 함경남병사로 승직되어 이순신을 군관으로 정하여 동행하였다.3) 이것은 이용이 전년에 순신의 위인을 알지 못하고 심히 박대한 것을 후회하여 이러한 사람을 참모로 정하고 다시 친절한 교제를 하는 것이 영광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착한 뒤로 병사가 순신을 지극히 우대하며 대소 군무를 모두 상의하여 정의가 날로 더하였다.

이때에 함경도 북단인 두만강 건너편 지방의 수천리, 지금으로 말하면 길림성과 연해주 지방에 번호藩胡라는 오랑캐가 있었다.

유목과 침략으로 본업을 삼고 농작은 부업적인 것이다. 그 중에도 가장 강한 부락의 추장은 니탕개尼蕩介와 울지내鬱只乃와 율보리栗甫里의 무리 셋이요 그밖에도 여러 추장이 있었다.
이 세 추장은 다 힘이 대단하고 심성이 잔혹하기로 유명하였다. 각기 휘하의 장졸도 혹 수천 혹 수만여 명씩이나 있었다.

수백년 이래로 조선과 중국의 우환거리가 되었다. 이들이 함께 침범하면 마을을 분탕질하고 부녀와 재물을 약탈하여 북방에 편안한 날이 별로 없었다.

당시 함경북병사 김우서金禹瑞, 온성穩城부사 신립申砬, 경원慶源부사 김수金燧, 부령富寧부사 김의현金義賢 등은 다 조정에서 선발한 명장이라고 하는 인물들이었다. 적의 침략을 따라 동서로 대응하면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지만 끝내 섬멸하지는 못하여 변경 백성들은 날로 도탄중에 골몰하였다.

그 중에도 신립은 무용이 남달라 선전하여 적들이 꺼리는 바가 된다지만, 그들을 평정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적의 침략은 점점 심해졌다.

조정에서 이를 크게 근심하여 비록 작은 진의 변장이라도 북방 극지에는 인재를 택하여 임명하여왔다. 이해 10월에 이순신으로 건원보4) 권관을 임명하였다.

원래 이 건원보는 적들이 들어오는 길목에 있고 또 소진이어서 군사도 불과 수백명이기 때문에 실로 가고 싶어 하는 무변은 없었다. 그러기로 후원해주는 사람도 없는 이순신에게로 이 벼슬이 떨어진 것이었다. 순신은 도리어 장부가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울 자리라고 생각한다.

순신이 건원보에 도임하여 그 부하 장사將士와 밀의하되 “번호의 침략이 이렇게 심하여 우리 백성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 중에도 울지내가 제일 강포하다 하고 또 우리 건원보와 경계가 맞닿았으니, 만일에 울지내가 수천 병마를 거느리고 본보를 범하여 온다면 본보의 병력이 약소한즉 중과부적이 될 것이오, 인근 각 읍에 청병한다 할지라도 시일이 늦어 고립되어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다. 병법에 이르되 선발제인先發制人이라 하였은즉 비책으로써 강적을 격파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고 영리하고 재간 있는 진무5) 한사람을 택하여 여차여차 하라고 계책을 가르쳐 보내었다.

이때에 적의 추장 울지내는 천고마비의 가을을 맞이하여 일거에 두만강을 건너가서 난을 일으키고자 하던 차에 문득 그 부하 장사가 순행을 돌다가 조선에서 강을 건너온 상인 하나를 포로로 잡아왔다.

울지내는 그 잡아온 사람을 베어버리라 하였는데 그 사람이 엎드려 생명을 빌며 하는 말이 “소인은 건원보에 거하옵더니 권관 이순신이 새로 도임하였는데 그 미첩과 함께 와서 요동遼東 몽고蒙古 방면에서 산출하는 보물 노리개를 좋아하여 천금을 아까워 아니하고 널리 구하는 중이온데 소인이 그 수용에 응하려고 하여 무역차로 온 상인입니다. 몸에 가졌던 자본금은 바쳤사오니 부디 살려주십시오” 하였다.

울지내는 건원보를 삼키려 하던 차에 그 상인의 말을 듣고는 이순신의 신분과 그 미첩의 자색과 재보의 많고 적음을 상세하게 물었다.

그 상인은 경황망조하는 듯한 태도로 “장군의 칼이 소인의 머리를 겨누는 이판에 추호인들 거짓말을 하오리까” 하니 울지내는 “이놈! 장군이라니!” 하며 호통 친다.

그 상인은 “예 대왕!” 하였다. 울지내는 “대왕이라고도 말고 천가한天可汗 이라고 존호를 불러라!” 하였다. 그 상인은 고하기를 “이순신은 본래 서울서 큰 장사꾼의 자제로, 아니 서울 갑부의 아들로, 아니 갑부의 외동 아들로, 돈을 물 쓰듯 하고 보검이며 조궁6)이며 기이한 전통이며 그 밖에도 천고의 유물 골동骨董이 전후좌우에 널렸다 합니다. 그 애첩의 자태와 얼굴은 천하무쌍한 절색이라 건원보 부녀들이 이르기를 어찌 아리따운지 바로 삼켜도 목구멍에도 걸리지 않고 넘어갈 듯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요” 하였다.
울지내는 본래 재물을 탐하고 호색하는 오랑캐의 근성이라 이 말을 듣고는 미칠 듯이 좋아하였다.

연해주 오랑캐를 유인책으로 섬멸

 
울지내의 생각에는 내 마땅히 그 미인과 보검 조궁 같은 물건을 가져와 니탕개와 율보리 로 하여금 입에 침을 흘리게 하리라고 한 뒤에 그 상인을 풀어 건원보로 가는 길을 인도하게 하고 부하 정병 5백명만 뽑아 거느리고 그날 황혼에 강을 건너 함매7)하고 건원보로 풍우같이 들어갔다.

이것은 울지내가 만일에 대병을 이끌고 건원보를 친다하면 반드시 인근 마을과 북병사가 병력을 내서 구원할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대전쟁이 일어나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고, 또 그 미인과 재보를 독점하기가 여의치 않으리라 하여 차라리 기습작전으로 야습을 해서 이순신을 사로잡고 제 욕심을 채우자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때에 울지내는 정병을 지휘하여 오경8)에 건원보에 가까운 산골 협로狹路에 이르니 길에 굵은 나무토막과 암석이 가로막아서 말이 통행하기가 곤란하였다. 울지내는 그 인도하는 상인을 불러 그 연고를 물었다.

상인은 대답하되 “생각하건대 필시 이순신이 대왕의 병마가 올까 겁이 나서 한 일인가 합니다” 하였다. 울지내는 운수가 다 되었던지 의심을 안 하고 그를 넘어서 행진하는 판에 천만 뜻밖에 대포소리가 한번 일어나며 사방에서 복병이 내달아 횃불은 하늘을 태우는 듯 하고 화살은 비 오듯 하였다.

울지내의 군사들은 사상자를 돌아볼 수가 없어서 흩어져 목숨을 구하려 하였으나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게 되어 오백 인마人馬가 화살과 돌에 맞아 바로 염라국閻羅國 귀문관鬼門關으로 행하게 되었다.

울지내는 뒤늦게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에 빠진 줄 깨달았다. 그 유인하던 상인을 찾아 분을 풀려 하였으나 벌써 간 곳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울지내는 전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제 부하 군사의 군복을 바꿔 입고 기어서라도 고개를 넘어 도망하려 하는데 문득 화광이 충천하며 한사람 대장이 칠 척 장검을 비껴들고 천리 준마를 빨리 몰아 앞을 막아 내닫는다.

“이놈 울지내야! 네 죄악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으니 하늘의 벌을 피할쏘냐? 내 오늘 밤에 너를 잡아 우리 창생의 도탄지고塗炭之苦를 풀고자 한다” 호령하고 울지내를 생포하여 수하 무사에게 결박하게 하였다. 후일 남파 홍우원이 시를 지었다.
다음날 결박한 울지내를 함거檻車에 실어 북병사에게 보냈다. 북병사 김우서는 울지내를 죽여 효수梟首하였다.

이로부터 이순신의 위명이 멀리 오랑캐 땅에 진동하여 니탕개 율보리의 무리가 감히 건원보를 흘겨보지를 못하였다.

북병사 김우서는 이순신이 일개 소진의 변장으로 이렇게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을 시기하여 조정에 장계狀啓하되 “이순신이 일개 소진의 권관으로 주장主將에게 고하여 상의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독단적으로 병사를 움직여 변경에 중대사건을 단행하였습니다. 만일에 실패하였으면 그 책임은 주장에게 돌아갈 것이니 실로 위험한 인물입니다. 비록 공이 있으나 상은 행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무고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북변의 세 추장을 크게 근심하다가 이순신이 소진의 병력으로 기계奇計를 안출하여 범 같은 울지내를 생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장차 포상을 행하려 하였더니 그 주장이 되는 북병사 김우서의 무고로 인하여 그만 정지하고 말았다.

이해 계미1583년에는 순신의 나이 39세였다. 조정에서는 11월에야 훈련원 참군이란 직함으로 전날의 공을 포상하였다.12) 순신의 영명이 비록 날로 높아가나 권세가에 잘 보이려 하지 않고 또 조정에서 뒤를 밀어 주는 이가 없으니 벼슬길에 나선 지가 장근 십년이로되 의연히 하료下僚에 머물러 있었으나 그 의기는 항상 태연자약하였다.

계미1583년 11월 15일에 순신의 부친 이정이 아산 향제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이때 순신은 건원보에 있었다.

꿈의 징조가 흉하여서 부친의 신상을 근심하였으나 변방 극지에 몸이 붙어 있어서 찬바람과 큰 눈에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더니 그 이듬해 갑신1584년 1월에야 비로소 흉보를 듣고 2천리 먼 길에 시급히 분상13)하였다.

때마침 감사 정언신鄭彦信이 북변을 순행하다가 순신의 분상함을 듣고 그 영명을 본래부터 사랑하는 마음에서 크게 염려하여 “만일 급행한다면 반드시 찬바람에 몸이 상할 것이니 너무 애통하여 이효상효以孝傷孝함이 불가하다” 하여 군관을 보내어 문상하고 위로하여 권하되 “성복14)하고 서서히 행하라”고 하였다.

순신이 감사의 후의에 답하되 “자식이 되어 그 부모의 흉보를 듣고 어찌 시각인들 지체하겠습니까” 하고 준마를 타고 밤낮을 겸행하는데 순신은 건장한 사람이라 무사히 득달하여 향제에 온 뒤에야 성복하였다.

조정에서 순신의 지용은 이미 아는 바였다. 장차 등용하여 북방의 호적을 막게 하고자 하여 소상15)이 겨우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언제 상이 끝나는가를 서너 차례나 물어왔다.

병술1586년 3월에 조정에서 순신의 삼년상이 끝났음을 알고 곧 사복시 주부16)에 임명하였다. 그 후 겨우 16일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17)병마만호를 제수하였다.

조산보는 북쪽 끝에 있어 바로 오랑캐의 소굴과 접경하고 침략이 빈번하니 조정에서 인재를 택하여 순신으로써 적임자라 하여 이 벼슬을 시킨 것이었다.

정해1587년 2월에 일본의 해적선 5~6척이 전라도 녹도18)를 침범하였다. 녹도만호 이대원李大源이 병선을 몰고 힘껏 싸워 승리하였다.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이 그 공을 시기하더니 그 수일 후에 또 해적선 팔구척이 손죽도19)를 침략한다.

좌수사 심암이 이대원을 척후장으로 삼아 먼저 교전하게 하고 심암은 배 수십척을 통솔하고 관망만 하고 구하지 아니하여 이대원이 외롭게 역전하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심암이 군법과 국법에 위반한 죄를 스스로 알고 조정에 무고하여 상주하되 “적세가 크고 치열하여 이대원이 전사하였으니 군사를 보내 구원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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