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디지털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있다. 디지털, IT 기술 혁신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침투하고 있다. 패션 산업도 마찬가지다. 3D 프린터로 만든 화려한 드레스가 업계의 화제가 될 정도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엔 내가 디자인한 옷을 직접 출력해서 입는 것도 가능해질지 모를 일이다.

패션업계가 3D 프린팅 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사진=뉴시스]
패션업계가 3D 프린팅 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사진=뉴시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디지털 기술이 패션에 접목되는 건 ‘먼 미래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관련 기술이 발달하면서 패션 분야에도 심심찮게 적용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게 3D 프린팅 기술이다. 3D 도면을 바탕으로 3차원 물체를 만들어내는 이 기계는 ‘4차 산업혁명의 꽃’으로 불린다. 의료, 건축, 음식, 자동차, 디자인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하다. 사람의 인공 장기를 만들거나, 순식간에 새로운 집을 짓기도 하는 이 신통한 기계는 패션과도 궁합이 잘 맞는다. 패션의 바탕이 되는 인체도 3차원이라서다. 

3D 프린팅 패션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디자이너 아이리스 반 헤르펜의 사례를 보자. 2000년대 중반 패션계에 데뷔한 그녀는 업계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디자이너로 꼽힌다. 실리콘, 플라스틱 등 보통 패션 디자이너들이 쉽사리 사용하지 않는 재료를 적극 활용하고 있어서다. 비결은 3D 프린터다. 

2018 봄ㆍ여름 컬렉션 ‘Ludi Naturae’에서 선보인 제품도 화제가 됐다. 0.8㎜의 얇은 잎 모양의 패턴을 3D 프린터로 인쇄해 드레스에 붙였다. 딱딱한 분위기를 풍길 것 같던 3D 프린팅 드레스의 고정관념을 깬 제품이었다. 그녀는 지금도 3D 프린터 회사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창출해내고 있다. 

이 분야 스타는 헤르펜만 있는 게 아니다. 이스라엘 출신의 다니트 펠레그도 유명하다. 2014년 대학 졸업 패션쇼에서 처음으로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한 그녀는 독특한 접근 방식으로 화제가 됐다. 산업용 대형 3D 프린터가 아닌, 보급형 소형 3D 프린터 여러 대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보급형 소형 3D 프린터로 의복을 직접 제작해본 경험이 있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펠레그가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간다.

때마침 ‘필라플렉스’ 같은 3D 프린터에도 적합한 소재가 개발되면서 그녀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필라플렉스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도가 세기 때문에 인체를 유연하게 감싸는 의복 소재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졸업 패션쇼에서 선보인 5벌의 의상은 펠레그를 전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각종 매체가 그를 주목했고, 미국의 유명 TV쇼에도 초청받았다. 2016년 브라질 리오에서 열린 패럴림픽 오프닝 행사에선 두 다리를 잃은 장애를 가진 에이미 퍼디의 의상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최근엔 개인 홈페이지를 열고 소비자가 직접 컬러와 사이즈의 선택이 가능한 재킷을 3D 프린터로 제작해 판매 중이다. 

헤르펜의 파격적인 실험

필자는 패션업계의 부는 신선한 바람을 지켜보면서 한가지 호기심이 들었다. “3D 프린팅 기술에 아무런 지식도 없는 사람이 이를 이용해 의복을 만들 수 있을까?” 이게 가능하다면, ‘그날 입을 옷을 그날 출력해서 입는 것’과 같은 엉뚱한 상상도 현실이 될 수 있어서다. 이 호기심을 풀기 위해, 필자는 2년 전부터 직접 보급형 3D 프린터를 이용해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실험을 통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3D 프린터는 의복을 만들기에 더없이 적합한 도구다. 기존의 절삭 방식이 아닌 적층 방식으로 형태를 구현하는 이 기술은 보다 많은 디자인을 현실화한다.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구상해야 하는 패션의 특징과도 부합한다. 숙련된 사람의 손이 필요한 섬세한 공정도 손쉽게 해낸다.

하지만 단점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작업속도가 너무 느렸다. 3D 프린팅은 어떤 디자인이든 ‘뚝딱’하고 금방 현실에 내놓는 기술이 아니다. 작업할 땐 의외로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다. 필자가 사용하는 3D 프린터의 예를 들어보자. 출력 가능한 최대 사이즈가 240×190×200㎜(가로×세로×높이)에 불과하다. 1벌의 옷을 제대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출력하고 이를 연결해야 하는데,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다양한 소재 개발도 시급하다. 신축성을 지닌 여러 소재들로 인체의 굴곡에 맞게끔 옷을 만드는 건 가능했지만, 자연스러운 실루엣을 표현하기엔 한계가 뚜렷했다. 촉감도 문제다. 피부에 직접 닿는 느낌은 일반 섬유보다 훨씬 차가웠다. 오히려 실리콘 재질의 휴대전화 케이스를 손에 쥐었을 때의 감촉과 비슷했다. 

내가 입을 옷을 출력한다면…

물론 ‘속도’와 ‘소재’는 언젠간 해결될 일이다. 수많은 3D 프린팅 관련 스타트업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 중이라서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그날 입을 옷을 그날 출력해서 입는 것”까진 어렵더라도, “주말에 입고 싶은 옷을 주중에 디자인하고 출력해서 만들어 입는 것”까진 가능하지 않을까.  
전재훈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의류학과 교수 kingkem2@snu.ac.kr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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