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사업 인적분할하는 한국GM
납득하기 어려운 법인 분할 이유
노조 “원활한 구조조정 위한 꼼수”
또다시 뚫린 산업은행의 견제장치

한국GM이 지난 4일 열린 이사회에서 디자인센터ㆍ기술연구소 등을 떼어내 별도의 연구ㆍ개발(R&D) 법인을 만들겠다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평범한 인적분할인 듯 보였지만 정치권과 노조는 거세게 반발했다. 철수를 위한 또 다른 명분을 쌓는 게 아니냐는 이유에서였다. 문제는 한국GM이 이런 결정을 내릴 때 우리 정부는 아무런 견제도 못했다는 점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한국GM 법인 분할에 숨은 문제를 취재했다.
 

한국GM이 법인 분할을 추진하자 철수를 위한 수순이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진다. 사진은 폐쇄된 한국GM 군산공장.[사진=연합뉴스]
한국GM이 법인 분할을 추진하자 철수를 위한 수순이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진다. 사진은 폐쇄된 한국GM 군산공장.[사진=연합뉴스]

한국GM이 또다시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지난 5월 11일 정부가 한국GM에 7억5000만 달러(약 8500억원)를 지원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던 한국GM 철수설이 5개월여 만에 다시 불거졌다. 논란의 진원지는 한국GM이 추진하고 있는 법인 분할이다. 한국GM은 지난 4일 이사회를 열어 “자동차 및 부품에 관한 연구ㆍ개발(R&D) 사업을 인적분할해 별도의 R&D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오는 19일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안건이 최종 통과되면 12월 3일 법인 분할이 마무리된다.

쉽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신설하는 R&D법인(가칭 GM테크니컬센터 코리아)에서는 디자인 연구와 신차 개발에 전념하고, 기존의 한국GM은 생산ㆍ판매만 한다. 한국GM이 각각의 회사명과 대표를 갖춘 두 회사로 나뉘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크게 문제 삼을 게 없다. 특정 사업부를 별도 법인으로 분할하는 일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GM이 철수설을 숱하게 뿌려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법인 분할을 가볍게 넘길 순 없다. 한국GM 노조가 “법인 분할은 생산ㆍ판매 법인을 구조조정하기 위한 밑작업일 공산이 크다”면서 강력하게 반발하는 이유다.

정치권도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특히 법인 분할의 해명을 듣기 위해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된 카허 카젬 한국GM 사장이 불출석하면서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일부 전문가는 “한국GM 사태가 일단락된 이후 신차를 출시하는 등 정상화에 힘을 쏟고 있음에도 실적이 내리 감소세를 걷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GM 측이 생산ㆍ판매사업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 정리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GM의 경영 상황은 여전히 어둡다. 지난 6월 신차 이쿼녹스를 야심차게 출시했지만 판매 실적은 6월 4만6546대에서 9월 3만4816대로 떨어졌다. 1~9월 총 판매실적은 전년 동기 대비 15.1% 감소했다. 한국GM의 법인 분할 이슈가 먹튀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한국GM의 갑작스러운 법인 분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또다른 이유는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점이다. 김필수 대림대(자동차학) 교수는 “지금처럼 시장점유율이 떨어지고 팔만한 차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GM이 해야 할 일은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고 차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라면서 “별도 법인을 설립하겠다는 건 운영방법과 경영편리성에 관한 문제인데, 이는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꼬집었다.

한국GM 관계자는 회사를 둘러싼 논란을 일축했다. “요즘 자동차 시장의 대세는 큰 차다. 현재의 어려운 경영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선 미국 본사에서나 담당할 만한 중형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급의 개발을 맡아야 한다. R&D법인을 설립하는 이유다. 경소형차 개발ㆍ생산기지라는 꼬리표를 떼고 독립성과 규모를 갖춘 곳으로 거듭나야 본사에서도 흥미가 생기지 않겠느냐.”

법인 분할이 철수보다는 되레 GM 지부 내 한국GM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대책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주장은 어딘가 어색하다. 무엇보다 별도 R&D법인에서는 새로운 차종의 개발이 가능하고, 기존 연구소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논리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김필수 교수는 “법인을 별도로 나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면서 “다른 자동차 메이커들을 둘러봐도 별도의 R&D법인을 둔 곳은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법인을 분리하려면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왜 굳이 리스크를 만드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사실 한국GM의 법인 분할이 회사의 주장처럼 경영정상화를 위한 초석이 될 것인지, 노조의 말마따나 생산법인 정리를 위한 수순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문제는 GM이 ‘후자의 길’을 밟을 때 이를 제어할 마땅한 견제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GM의 2대 주주인 산업은행(지분율 17.0%)이 갖고 있는 견제장치는 사외이사 추천권과 지난 5월 지원을 약속하면서 받은 비토권(거부권) 정도다.

 

산업은행의 한국GM 견제장치가 유명무실한 거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사진=연합뉴스]
산업은행의 한국GM 견제장치가 유명무실한 거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사진=연합뉴스]

그중 사외이사 추천권은 유명무실한 수준이다. GM 측 사외이사가 7명인 데 반해, 산은이 추천한 사외이사는 3명에 불과해 안건을 결정하는 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법인 분할 안건에서도 산은 측 사외이사는 모두 반대표를 던졌지만 GM 측 사외이사가 찬성하면서 통과됐다.

비토권도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렵다. 이동걸 산은 회장은 국감장에 출석해 “만일의 경우 주총에서 비토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업계 관계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산은의 비토권은 자산 매각을 막기 위한 용도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법인 분할을 저지하기는 어렵다는 거다. 

일부에서 “현실적으로 산은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주총을 열지 못하도록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게 전부였다”는 지적을 쏟아내는 이유다. 산은 관계자는 “주총 금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기각될 경우엔 본안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어찌됐든 지난 5월 체결한 산은과 한국GM 간의 합의안에 또 구멍이 뚫린 셈이다.

한국GM 사태 ‘살아있는 이슈’

사실 이 문제는 처음이 아니다. 산은은 한국GM(당시 GM대우) 철수설이 흘러나오던 2010년 GM과의 합의를 통해 독자생존권과 경영권 견제장치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로부터 8년 뒤, 산은의 호언장담에도 한국GM은 경영난에 빠졌고 철수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거라는 보장은 없다. 2010년의 데자뷔가 될 수도 있다. 정부가 한국GM에 지원을 결정하며 한국GM 사태가 일단락되던 그 때, 일부 전문가는 “한국GM 사태의 불씨는 아직 살아있다”고 지적했다. 그말은 틀리지 않았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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