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사막의 라이언 ❸

이탈리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해 싸우던 오마르 무크타르의 독립군은 결국 궤멸한다. 무솔리니와 그라치아니 리비아 총독은 반군 수장인 무크타르를 민중들 앞에서 공개 처형하기로 한다. 1931년 마침내 ‘사막의 라이언’ 무크타르는 리비아 민중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탈리아는 무크타르를 처형하고 그의 게릴라 부대를 섬멸했지만 리비아 민중의 저항의지를 꺾지는 못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이탈리아는 무크타르를 처형하고 그의 게릴라 부대를 섬멸했지만 리비아 민중의 저항의지를 꺾지는 못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달걀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깨졌다면 그것은 동화이거나 신화가 된다. 그러나 이탈리아 최정예 기갑부대에 낙타 타고 달걀을 들고 돌진한 오마르 무크타르의 이야기는 동화도 아니고 신화도 아닌 사실이다. 사실이기 때문에 당연히 바위가 아닌 달걀이 깨진다.

무크타르의 독립군은 궤멸되고 무크타르도 포로로 잡힌다. 이탈리아군 법무관도 무크타르를 ‘전쟁 포로’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무솔리니와 리비아 총독 로돌포 그라치아니 장군은 ‘사막의 라이언’을 공개 처형함으로써 리비아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 한다. 1931년 반란군의 우두머리 무크타르는 리비아 민중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탈리아는 ‘전투’에선 이겼지만 ‘전쟁’에는 패배한다. 무크타르를 처형하고 그의 게릴라 부대를 섬멸했지만 리비아 민중의 저항의지를 꺾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지도자 ‘사막의 라이언’이 당당히 교수대에 오르는 모습은 리비아인들의 투쟁 의지에 기름을 붓는다. 71세 노인에 대한 교수형 집행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의 여론을 악화시키고 이탈리아 파시즘의 불명예가 된다. 결국 리비아는 1951년 이탈리아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성취한다.

무크타르 사후 20년 만에 그렇게 꿈꾸던 독립이 찾아왔지만 아마도 그는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을 듯하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무아마르 카다피는 무려 42년간 리비아를 철권통치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부족 간의 갈등은 심화하고 민주화 요구를 무력 제압하면서 수많은 살육을 저지른다. 이후 리비아는 처절한 내전 상태에 빠진다. 그의 급진적 이슬람주의와 사회주의 노선은 각국의 민주주의 세력과 거칠게 충돌한다. 카다피는 철권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크타르를 강제 소환한다.

‘사막의 라이언’ 무크타르는 결국 리비아 민중들 앞에서 공개 처형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사막의 라이언’ 무크타르는 결국 리비아 민중들 앞에서 공개 처형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자신이 외세와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국부’ 오마르 무크타르의 후계자임을 자임한다. 무크타르가 리비아의 모든 지폐에 등장하고, 영화 ‘사막의 라이언’도 카다피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제작된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카다피의 독재에 저항하는 반군들 또한 자신들을 오마르 무크타르의 후계자로 자처한다. 그리하여 무크타르가 무크타르와 죽기살기로 싸우는 기묘한 내전이 20년간 이어진다. 하늘에 있는 무크타르가 기가 찰 일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격동기였던 1871년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신봉하는 혁명의 급진주의자들이 모여 파리 코뮌(Paris Commune)을 결성한다.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주장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봇물처럼 쏟아진다. 그 모임에 초대받았던 칼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의 딱지를 붙인 온갖 해괴한 주장을 듣고 연단에 올라 이런 말을 남긴다. “저는 마르크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닙니다.” 아마도 무크타르가 리비아 내전 중에 환생했다면 그도 똑같은 말을 카다피와 반군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듯하다.

12세기 프랑스 클루니(Cluny) 지방의 수도사였던 베르나르(Bernard)는 그의 ‘세상에 대한 조롱(De Contemputu Mundi)’라는 시에서 세상을 냉소한다.  “Stat Rom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로마라는 이름은 오늘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이름뿐이다).”

우리나라 대형 교회들이 세습과 돈 문제로 어지럽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 대형 교회들이 세습과 돈 문제로 어지럽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것’과 자신을 일체화하고 싶어하기도 하고 ‘위대한 것’의 이름을 팔고 사람들을 선동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도 한다. 무솔리니도 ‘위대한 로마황제’와 자신을 일체화하고 그 후계자를 자처하며 ‘로마의 부활’을 팔아 리비아를 침공한다. 카다피는 ‘위대한 오마르 무크타르’를 팔아 반군들을 살육한다. 파리 코뮌에 모인 야망가들은 마르크스의 이름을 팔아 자신들의 정권욕을 채운다.

우리나라 대형 교회들이 세습과 돈 문제로 어지럽다. 다른 조직도 아니고 그것이 교회라는 조직이다 보니 보기에 더욱 민망하다. 그 모든 어지러운 일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벌어진다. 수도사 베르나르의 시처럼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이름뿐‘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예수가 오늘 한국에 재림再臨한다면 칼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에서 “나는 마르크스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내 이름은 지저스 크라이스트다. 그렇지만 크리스천은 아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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