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사막의 라이언 ❹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대개의 국가들은 오마르 무크타르처럼 독립투쟁에 헌신한 지도자들을 화폐의 주인공으로 올렸다. 숱한 외침에 시달리고 그때마다 많은 이들이 죽어가며 지켜왔던 이 나라에서는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 같은 독립투사가 왜 화폐의 인물이 되지 못했을까. 의아하다.’

국가의 화폐에 올리는 인물 선정이란 실로 중차대한 일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국가의 화폐에 올리는 인물 선정이란 실로 중차대한 일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이탈리아에 공포의 대상인 ‘사막의 라이언’으로 불리며 20년간 리비아의 독립투쟁을 이끌던 무크타르는 결국 1931년 중과부적으로 이탈리아군에 패퇴한다. 부상당한 ‘사자’는 이탈리아의 포로로 잡힌다. 이탈리아 군 총사령관이자 리비아 총독이었던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가 70세를 넘긴 노구에 부상까지 당한 ‘사자’의 손발을 쇠사슬로 묶어 가둬야 할 만큼 그는 이탈리아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속전속결의 이탈리아 군사법정의 재판을 통해 그해 9월 리비아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 교수형에 처해진다. 아무리 ‘반란군의 수괴’라고 해도 70세 넘은 노인을 공개 처형한다는 것은, 특히 인간 중심의 문예부흥 총본산인 이탈리아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유럽 모든 나라들로부터 비난받은 ‘만행’이었지만 무솔리니로서는 리비아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무크타르는 자신이 늙어 자연사하지 않고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그럼으로써 민중들의 저항의지가 더욱 강해지리라 믿는다. 그의 믿음대로 리비아인들은 그의 처형을 목격하고 더욱 저항의지를 다져 결국 독립을 쟁취한다.

리비아인들은 독립 후 리비아 지폐에 무크타르의 모습을 올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리비아인들은 독립 후 리비아 지폐에 무크타르의 모습을 올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독립된 리비아는 10디나르 지폐에 그의 모습을 올렸다. 리비아 10디나르 지폐 앞면에는 오마르 무크타르의 초상이 자리잡고, 뒷면에는 그와 함께 싸웠던 게릴라부대가 등장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20디나르와 50디나르 지폐에 ‘셀프’로 자신의 얼굴을 올렸다가 권좌에서 쫓겨난 후 지폐에서 사라졌지만, 무크타르는 여전히 모든 리비아인들의 지갑 속에서 소중하게 살아 숨쉰다. 조국의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남긴다는 것은 아마도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일 듯하다.

모든 국가의 화폐란 국가의 얼굴이고, 그 화폐에 들어가는 모든 문양과 인물은 곧 국가의 정체성이자 지향점이며, 모든 국민의 ‘역할 모델(role model)’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화폐에 올라가는 인물은 많아야 5~6명에 불과하다.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화폐에 얼굴을 올리는 영예의 주인공도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퇴계, 율곡, 그리고 신사임당 정도일 뿐이다. 화폐도안 인물 선정을 경쟁률로 따진다면 가히 ‘수십억 대 1’ 경쟁이겠다.

사실 그것이 국가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는 의미를 가졌다면, 국가의 화폐에 올리는 인물 선정이란 실로 중차대한 일이다. 어쩌면 피선거권을 가진 2000만 한국인 중에서 대통령 한명을 선정하는 작업보다 더욱 중대하고 치열해야 할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화폐의 인물로 선정된 분들 모두 분명 훌륭하신 분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대개의 국가들은 오마르 무크타르처럼 독립투쟁에 헌신한 지도자들을 ‘국부’로 추앙하고 화폐 주인공으로 모신다.

지정학적으로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들이 오가는 길목에 놓여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숱한 외침에 시달리고 그때마다 모두 피흘려 죽어가며 지키고 되찾아왔던 나라의 화폐에서 그들의 발자취를 찾기 어렵다. 이순신 장군을 예외로 한다면 율곡 선생이나 퇴계 선생, 그리고 신사임당은 조금은 한가롭다. 500원 주화의 난데없는 황새 한마리도 뜬금없다. 여성이라면 유관순보다 왜 신사임당이어야 하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크타르와 같았던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 안창호 대신 조선의 유학자들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국가의 지향점이 되어야 하는지 석연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독립투사가 화폐의 인물로 오르지 못했다.[사진=뉴시스]
우리나라에서는 독립투사가 화폐의 인물로 오르지 못했다.[사진=뉴시스]

혹시 일본과의 불행했던 과거를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로 가기 위한 ‘평화와 선린의 미래지향적’ 정신의 발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은 1960년대까지 1000엔 지폐에 버젓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초상을 올리고, 지금도 1만엔 지폐에 조선정벌의 당위성을 주창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모시고 있다. 5000엔에 얼굴을 올린 동경대 총장이자 일본 지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니토베 이나조新度戶稻造는 “조선이라는 죽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일본은 하루빨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입에 달고 다닌 인물이다. 아마 여전히 그런 인물들의 정신이 일본의 정체성이자 국가지향점인지도 모르겠다.

용서와 화해를 통한 새 시대는 가해자의 반성을 전제로 한다. 반성과 사죄가 없는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먼저 그 역사를 없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도 대단히 어설프다. 그래서인지 제주국제관함식에 일본 군함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소위 ‘욱일승천기’ 문양의 해군기를 달고 오겠다고 말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우리의 지폐에 유관순과 김구, 안중근을 모시고 있어도 저들이 저리 방자하게 굴었을까 궁금해진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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