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의 고행, 朴의 낯선 청사진

서울시가 블록체인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선도하는 에스토니아처럼 되겠다는 건데, 정말 가능한 일일까. 에스토니아가 블록체인 선도국에 올라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살펴보면 답이 금세 나온다. 블록체인 생태계는 돈과 욕심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치밀하면서도 장기적인 청사진이 전제다. 서울시에는 이런 청사진이 있을까. 더스쿠프(The SCOOP)가 그 답을 냉정하게 찾아봤다.  

서울시가 블록체인 투자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장 우리나라에선 ICO도 할 수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서울시가 블록체인 투자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장 우리나라에선 ICO도 할 수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서울시의 블록체인 투자 마스터플랜이 공개됐다. 박원순 시장은 10월 3일 ‘블록체인 도시 서울 추진계획’을 밝혔다. 먼저 마포와 개포에 200여 블록체인 기업이 입주할 수 있는 집적단지를 조성하는 데 603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2020년까지 1000억원 규모의 ‘블록체인 서울 펀드’를 조성해 블록체인 창업기술을 지원한다.

행정 서비스에도 블록체인을 도입한다. ‘온라인 투표 시스템’ ‘중고차 이력관리’ ‘기부금 관리’ ‘하도급 대금 자동지급’ ‘각종 증명서 발급’ 등의 영역에서다. 에코마일리지 등 서울시가 제공하는 마일리지는 ‘S-코인’이라는 가상화폐로 전환해 교통카드 충전, 지방세 납부 등에 사용하거나 ‘서울페이’로 연계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이렇게 5년간 시 예산 1233억원을 쏟아붓는다. 한국 정부가 올해 1월 핵심 정책과제로 블록체인을 선정하고 ‘142억원 투자’를 결정한 것보다 규모가 크다. 막대한 투자, 우수한 인재 육성, 산업단지 조성 등 삼박자를 갖춘 중장기 플랜이다.

계획을 발표한 장소도 의미가 깊다. 유럽을 순방 중이던 박 시장은 블록체인 기업들의 성지로 불리는 스위스 주크에서 마이크를 잡고 블록체인 청사진을 그렸다. 주크는 스위스가 가상화폐 특구로 육성하는 도시다. 전세계 가상화폐 공개(ICO)의 절반 이상이 이뤄지고 있다. 박 시장은 뒤이어 에스토니아로 발걸음을 돌렸다. 국내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스토니아는 블록체인 기술력에서 선두를 달리는 국가다. 대부분의 행정 서비스가 가능한 전자정부포털인 ‘엑스로드’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했다.

박 시장은 케르스티 칼유라이드 에스토니아 대통령을 만나 블록체인 정책을 공유했다. 에스토니아는 ‘블록체인 서울’의 롤모델이다. 박 시장은 “서울도 블록체인 선도도시 선점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5년 뒤 서울은 블록체인 선도도시 반석에 오를 수 있을까. 김상욱 충북대(경영정보학) 교수가 내다본 미래는 비관적이다. “지자체가 블록체인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건 긍정적인 일이다. 에스토니아와 주크가 블록체인으로 성공한 데는 정부의 적극적인 육성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5년 뒤 서울시가 이들처럼 되리라 장담하기엔 이르다. 서울시 계획은 기술 육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당장 ICO도 할 수 없는 우리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얘기다. 블록체인 보상 시스템인 가상화폐를 바라보는 시선도 삐딱하다. 에스토니아는 10년 전부터 치열한 연구와 사회적 합의를 거쳐 블록체인을 도입했다. 우리에겐 그런 과정이 있었는가.”

“블록체인 서울에 1233억원 투자”

에스토니아는 1990년대 후반부터 전자정부를 목표로 삼고 정책을 추진했다. 식민지배 끝에 변변한 경제 인프라를 갖추지 못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지만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국가 IT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해외 투자업계 관계자는 “에스토니아 국민들은 태어나자마자 디지털 칩이 내장된 전자신분증을 발급 받는데, 이를 인증만 하면 온라인상에서 납세ㆍ투표ㆍ교육 등 모든 행정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면서 “국민 정서 자체가 IT 기술을 향한 반감이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소프트웨어 교육은 에스토니아의 IT 혁명을 이끈 또 다른 축이다. 에스토니아는 유치원 때부터 코딩교육을 권장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는 의무다.

블록체인을 도입하게 된 계기도 서울시와 다르다. 전자정부는 늘 해킹 위협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보안 전문회사인 가드타임과 블록체인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트코인 관련 논문이 공개되기도 전인 2007년의 일이다. 전자정보 플랫폼에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한 것도 2012년이다. “4년 뒤 비트코인이 2000만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언에 코웃음을 치던 시기다.

 

하지만 이런 에스토니아마저 진통을 겪고 있다. 블록체인 시스템은 공유가 원칙인데, 행정 문서 중엔 투명하게 공개되기 원치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여전히 많다는 거다. 우리는 다르다. 블록체인만 적용하면 기존 산업을 뒤흔들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날 것만 같은 기대감만 가득하다. 섣부른 청사진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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