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과 경제, 그리고 유전 

사람의 키를 결정짓는 건 유전적 요인일까 환경적 요인일까. 많은 학자들은 “인종간 키 차이를 일으키는 유전적 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식생활 등 후천적 요인에 따라 키가 결정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키에 유전적 인자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100년 전에도 컸고, 동티모르 사람들은 100년 전에도 작았기 때문이다. 더스쿠프(The SCOOP)와 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가 키와 경제, 그리고 유전의 상관관계를 살펴봤다. 

한국 여성 평균 키는 지난 100년간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커졌다.[사진=뉴시스]
한국 여성 평균 키는 지난 100년간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커졌다.[사진=뉴시스]

2016년 유로 사이언스 오픈 포럼(ESOF)에서 발표된 자료를 보자. 한국 여성의 평균 신장은 1914년 142.2㎝에서 2014년 162.3㎝로 무려 20.1㎝ 커졌다. 세계 179개 국가 중 상승폭 1위다. 한국 남성 역시 같은 기간 159.8㎝에서 174.9㎝로 15.1㎝ 커져 세계 3위의 상승폭을 기록했다. 한국인의 키가 ‘폭풍 성장’을 한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은 “인종 간 키 차이를 일으키는 유전적 인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식생활과 같은 후천적 요인이 키 성장에 주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경제학자 그레고리 클라크(Gregory Clark)는 자신의 저서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에 노동자의 임금(기준 밀), 1인당 단백질 소비량 등 다양한 환경지표와 기원 전후 유골 및 여러 나라에서 보고한 키 측정치를 비교ㆍ분석한 결과를 수록했는데,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종 간의 키 차이를 일으키는 유전적 결정 인자는 피그미족 정도를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는다.” 

키와 유전적 요인이 별 상관 없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산업화를 거치기 전 한국과 일본 남성의 평균 키는 미국 남성의 평균보다 12~18㎝ 작았지만 식생활과 같은 환경 요인이 개선된 지금은 격차가 5~6㎝로 줄어들었다. 이는 신장에 미치는 환경적 요인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럼 인종간 키의 차이가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걸까. 세계에서 가장 평균 신장이 가장 큰 나라인 네덜란드와 그와 반대인 동티모르의 예를 보자. 네덜란드 남성의 평균 키는 1914~2014년 13.1㎝(169.4㎝→182.5㎝)로 커졌다. 반면 동티모르 남성의 평균 키는 1914년 153.0㎝로 가장 작았고, 100년 후에도 6.8㎝밖에 크지 않았다. 동티모르는 여전히 179개국 중 가장 키가 작은 국가다. 

 

동티모르가 네덜란드 수준으로 보건ㆍ위생ㆍ영양 등의 환경이 개선된다면, 동티모르 남성의 평균 키는 네덜란드 남성의 평균만큼 커질 수 있을까. 필자의 답은 부정적이다. 인종과 별개로 개인의 유전적 인자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키는 각자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성장 잠재치’가 환경 요인에 의해 소멸되느냐 발현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큰 키와 작은 키는 유전적 대물림의 결과물이라는 얘기다. 

키의 비밀, 환경 vs 유전 

한국과 일본의 남성 평균 키를 비교해 보면, 키와 유전적 대물림의 상관관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00년간 한국 남성의 평균 키는 159.8㎝에서 174.9㎝로 15.1㎝ 커졌다. 반면 일본 남성의 평균 키는 156.2㎝에서 170.8㎝로 14.6㎝ 자라는 데 그쳤다. 한국 남성의 유전자에 일본을 능가하는 ‘성장 잠재치’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서울대 의대 해부학교실에서 15~19세기 조선시대 남성 67명의 유골에서 채취한 넙다리뼈(대퇴골)로 평균 키를 추정한 결과, 한국 남성의 당시 평균 키 161.1㎝로 나타났다. 비슷한 시기의 일본 남성 평균 키 154.7㎝보다 6㎝ 이상 크다. 

 

지난 50여년 한국은 사회ㆍ경제ㆍ정치ㆍ문화 등 많은 분야에서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인의 평균 키 또한 가파르게 상승했다.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보건ㆍ위생ㆍ영양 등 후천적 환경이 개선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발현되지 못했던 성장 잠재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하지만 이는 남한에 국한된 이야기다. 주민들의 신체자료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아 정확한 수치를 알 순 없지만 남북한 성인남성(탈북남성으로 추정)의 키 차이는 10㎝가량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잠재된 성장판 열어야

나이가 어릴수록 남북한 키 차이는 더 커진다. 다니엘 슈베켄디에크(Daniel Schwekendiek)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남북한 유아들의 평균 키 격차는 8~12㎝에 달했다. 특히 7세 남자의 경우, 남한이 122㎝, 북한이 109.3㎝으로 무려 12.7㎝ 차이가 났다. 남북한의 유전적 요인이 똑같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적 차이에서 비롯된 북한의 영향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그만큼 남북 통일 이후의 삶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영양 불균형을 해소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북한의 경제적 환경이 빨리 개선돼 북한 주민의 성장판이 열리길 기대해 본다. 
남윤자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 yunja@snu.ac.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