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여행 제1편 서울 제3장 근무지

이순신 장군의 흔적은 서울에도 상당히 많다.[사진=장정호 부사장 제공]
이순신 장군의 흔적은 서울에도 상당히 많다.[사진=장정호 부사장 제공]

이순신이 16일간 근무했던 곳 : 사복시 터
“본영의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그 편에 순찰사의 공문과 명나라 시랑 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다. 사복시의 말 5필을 중국에 보내기 위해서 올려 보내라는 공문도 왔기에 병방 진무를 보냈다(계사년 5월 12일, 난중일기 중 계사일기).”

사복시는 조선시대에 말과 마구, 그리고 목장을 관장하던 관청입니다. 1586년, 이순신은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칩니다. 그리고 부임한 곳이 사복시입니다. 직책은 종6품 주부主簿였습니다. 그런데 사복시에 부임한 지 불과 16일 만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가 됐습니다. 만호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종4품 관직입니다. 이듬해에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의 둔전관도 겸하게 됩니다. 

사실 사복시 터에는 아이러니한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이곳엔 삼봉 정도전의 집이 있었습니다. 정도전은 조선의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었지만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과 세자 책봉 문제로 충돌합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첫째 부인 출신이었는데, 정도전은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밀었던 것입니다.

조선 건국을 위해 피땀 흘려온 첫째 부인의 아들들을 제쳐두고 둘째 부인의 어린 아들이 세자가 된다는 것을 이방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을 죽였습니다. 후일 태종이 된 이방원은 정도전의 집터에 말과 마구를 관리하는 관청인 사복시를 설치했습니다.

그로부터 수백년간 이곳 사복시 터는 계속 말馬과 관련된 장소였습니다. 1983년까진 서울경찰청 기마대가 이곳에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말과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사복시 터에 들어선 빌딩의 이름은 ‘이마빌딩’입니다. 사람의 이마가 아닙니다. 이로울 리利자에 말 마馬자를 씁니다. 말을 이롭게 하는 빌딩이라는 뜻이니, 여전히 말과 관련된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회엔 이순신 유적의 성지이자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충남 아산 현충사로 떠나보겠습니다. 아산 현충사 안에 이순신 표준 영정이 있고, 기념관이 있으며, 이순신 고택과 유물도 있습니다. 특히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진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현충사는 유생들의 건의로 조선 숙종 32년(1706년) 어명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시절 현충사와 충무공 묘소가 일본인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윤치호를 중심으로 충무공 유적 보존회가 결성됐습니다. 전국적인 현충사 복원 모금운동도 일어났습니다. 2만명 넘는 선조들이 모금운동에 동참한 덕분에 현충사와 묘소를 끝내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장정호 교육다움 부사장 passwing7777@naver.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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