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잊은 경영 지킴이들

나이를 잊은 경영자들이 있다. 고령에도 경영일선을 떠나지 않고 투혼을 발휘하는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 정식품 정재원 명예회장, 샘표 박승복 회장 등이다. 그들은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후배 경영자에게 전수하고 있다. 촛불은 꺼지지 않아야 촛불인 법이다. 이들은 이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 92세 나이로 여전히 경영일선을 누비고 있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1988년 박세직 88올림픽 조직위원장(당시)이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이하 회장)에게 SOS를 쳤다. “대부분의 기업이 공산권 국가 지원을 꺼립니다. 냉전에 대한 반감 때문으로 보입니다. 롯데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급한 구조요청. 이유는 이랬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LA올림픽은 이데올로기의 격한 대립으로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전락했다. 서울 올림픽은 달라야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대부분의 공산정권이 서울 올림픽 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박 위원장의 요구는 쉽게 말해 ‘공산권 국가의 올림픽 참가 경비를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신 회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리고 내린 중대 결단. “서울 올림픽 기간 중 소련(당시) 스폰서 역할을 하겠다.”

유능한 기업가는 나이도 잊어
유능한 기업가는 한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신 회장은 평소 짠돌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절약하지만 투자가 필요한 순간엔 과감하게 돌진한다[「롯데와 신격호, 도전하는 열정에는 국경이 없다」 중 일부. 신 회장의 뇌리에 뭔가 스쳤음이 틀림없다. 롯데 한 임원의 회상이다. “소련을 후원했을 뿐 아니라 소련 선수의 경기 땐 롯데 임직원이 동원됐다.”

 
롯데의 적극적 후원에 감동한 사람은 그라모프 당시 소련 체육부장관. 그는 롯데와 좋은 파트너십을 맺기로 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롯데 임직원을 손수 초대하기도 했다. 바로 이때 롯데의 ‘러시아 판로’가 열렸다고 보면 된다. 실제 1990년대 초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제과의 제품이 러시아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신격호.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평소엔 느긋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야수’처럼 돌진하는 그의 성격 탓일 수 있다.

실제로 그가 이룬 성과를 보면 ‘투혼’이 보일 때가 많다. 1988년 당시에도 그는 눈코 틀 새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현해탄 경영’을 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시기였을 게다. 그래도 그는 ‘승부처’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승부수가 아니었다면 롯데는 지금도 ‘러시아 진출’을 위해 안간힘을 썼을지 모른다.

 
러시아 진출에 초석을 놓은 게 벌써 24년 전이다. 그의 나이는 올해로 92세. 이제는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지만 그는 오늘도 경영전선을 누비고 있다. 그는 올해 1월 8일 ‘롯데몰 김포공항’을 전격 방문했다. 지난해 12월 김포공항 국제선청사 맞은편에 문을 연 롯데몰 김포공항은 백화점과 마트ㆍ쇼핑몰ㆍ토이저러스ㆍ디지털파크 등 유통시설뿐 아니라 호텔과 영화관까지 모두 아우르는 복합쇼핑공간이다.

연면적 31만4000㎡에 부지면적만 19만5000㎡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신 회장은 이날 별도의 수행원 없이 롯데몰을 찾아 매장 곳곳을 꼼꼼히 둘러보고 돌아간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깜짝 행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롯데그룹에 따르면 신 회장은 6개월여 전부터 주말에 운전기사만 데리고 수도권의 롯데백화점을 방문하고 있다. 주력 점포인 잠실점과 프리미엄아울렛 파주점 등 20여곳을 방문해 매출 현황과 고객 1인당 매출, 선호상품, 편의시설 운영 등을 자세히 파악했다.
최근 유통업계가 부진을 겪는 상황에서 현장을 직접 챙기며 조직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롯데백화점 임직원들은 비상이 걸렸다. 신 회장이 사전 예고 없이 집이나 사무실을 나설 때 운전기사에게만 행선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신 회장은 매장의 콘센트가 몇 개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을 정도로 매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며 “이런 신 회장이 매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질문하기 때문에 해당 점장들은 영업 현황과 고객 성향 등을 사전에 머릿속에 챙기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익장의 힘은 무섭다.

나이가 많다고 꼭 은퇴해야 하는 건 아니다. 미국에는 65세 이상의 근로자와 경영인들을 보호하는 ‘나이차별 금지법’이란 독특한 법규가 있다. 이 법에 따르면 고령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육체적•정신적 이유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까지는 기업에서 일할 수 있다.

 
미국 뉴욕의 한 교수는 “고령의 경영자들은 늙은 배우와 같다”며 “이들을 은퇴시키려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노익장의 힘이 그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얘기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인터넷판은 최근 고령의 나이에도 경영 일선에서 뛰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가를 소개했다. 마카오의 카지노 황제로 불리는 스탠리 호 마카오관광오락공사(STDM) 회장은 올해 90세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역을 고집하고 있다.

2002년 외국계 진입 허용 이전까지 마카오의 도박 산업을 독점하다시피 했고 지금도 마카오 도박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 최대 과일회사 돌의 데이비드 머독 회장도 그에 못지않은 ‘원로 현역’이다.
1985년 돌을 인수해 세계적인 업체로 키워낸 그는 125세까지 장수하는 것을 목표로 저열량 위주의 과일 야채 식단과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 유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계적인 가구 회사 이케아의 창업자 잉그바르 캄프라드는 이케아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의 은퇴법에 따라 1999년 서류상으로는 경영 일선에서 손을 뗐지만 실제로는 가구 디자인 하나하나까지 직접 챙긴다.

콩 박사 정재원의 열정
우리나라에도 ‘노익장 경영’을 펼치는 경영자가 많다. 65년 전통의 ‘백양 메리야스’를 만든 내의전문업체 BYC의 창업주 한영대 회장은 올해로 90세다. 이미 뒷선으로 물러났을 법한 나이지만 명예회장이 아닌 회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한 회장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회사로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다. 회사는 물론 매장과 공장 등 현장을 수시로 돌며 잠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로 95세인 정식품 창업주 정재원 명예회장도 제품개발 등 회사 주요 현안에 관여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요즘도 서울 회현동 사옥으로 매주 1회 출근하고 청주에 위치한 중앙연구소 직원들과 정기적으로 대화한다. 정 회장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많다. 그중 하나가 2010년 10월 15일 ‘대두심포지엄’ 사례다.

정 회장은 자타공인 콩박사다. 콩을 활용한 베지밀을 개발한 주인공이다. 그는 아직도 ‘콩’하면 ‘벌떡’ 일어난다. 2005년 10월의 일이다. 정 회장은 당시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제 대두(大豆)심포지엄에 참석하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했다. 가족은 물론 회사 관계자가 수차례 만류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10시간이 훌쩍 넘는 장기 비행을 견디겠다며 짐을 꾸렸다. 초청 받은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가겠다고 했다. 심포지엄 일정도 빡빡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프로그램에 참석함은 물론 정식품의 오랜 연구 결과도 포스터 발표를 해야 했다.

포스터 발표는 구두 발표와 다르다. 특정 장소에 A4용지 크기의 논문 자료를 붙이고 대기하다 관심을 가진 사람이 질문하면 답하는 방식이다. 언제 질문할지 모르는 탓에 논문 발표자는 하루 종일 기다리기 일쑤다.
젊은이도 감당하기 힘든 고된 일이었지만 정 회장은 “걱정하지 마라”며 참석을 강행했다.

하지만 꼭 고집 때문에 고행을 자처했다고 보긴 어렵다. 정 회장이 국제 대두심포지엄에 굳이 참가를 결정한 덴 남다른 이유가 있다. 사명감 때문이다. 그는 성인의 유당불내증(소장의 유당분해효소 결핍 때문에 설사•복통이 나타나는 병)과 콩의 우월한 효과에 대해 널리 알리고 싶어한다. 인류 건강을 위해서다. 그게 자신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정식품을 창업한 이유도 같다. 정식품의 창업이념은 ‘인류 건강 문화에 이 몸 바치고저’다. 정 회장이 고령에도 베지밀의 신제품 개발에 관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지난해 6월 내놓은 당 건강 관리를 위한 맞춤 두유 ‘GI 프로젝트 베지밀 에이스’가 바로 정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제품이다. 정식품 관계자는 “정 명예회장이 매일 3팩씩 두유를 꾸준히 마시면서 당뇨와 고혈압을 극복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제품 개발을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장년층을 위한 맞춤형 두유 개발 과정에도 자문 역할로 참여하고 있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정 회장은 지금도 연구의 끈을 놓지 않는다. 콩과 영양에 관한 최신 영어 논문도 찾아 읽고 인터넷 검색도 즐긴다.

 
올해로 94세를 맞은 삼양식품 전중윤 명예회장은 2주에 한 번꼴로 강원도 대관령목장에 간다. 금요일 오후 출발해 월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다. 40여 년 전 직접 대관령목장을 개척한 전 명예회장은 정기적으로 목장을 방문해 목초지를 둘러보며 심신도 단련한다. 주중에는 식품과 건강, 경영 등과 관련해 독서와 저술 활동을 한다. 9000권의 책을 보유할 정도로 독서를 즐긴다.

샘표 박승복 회장은 올해로 91세다. 하지만 그의 하루일과는 거의 똑같은 시간에 시작된다. 오전 5시다. 1997년 장남인 박진선 사장에게 샘표 경영을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지금도 매일 충무로 본사에 출근해 회사 업무를 살핀다. 회장은 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만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점심 무렵에는 회사 인근 테이크아웃 커피점에서 젊은 직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박 회장을 쉽게 볼 수 있다.

1999년부터 매년 거르지 않고 신입사원들과의 대화 시간을 갖고 있다. 손수 작성한 ‘직장생활 10계명’을 나눠준다. 샘표 관계자는 “나이는 90세이지만 40대처럼 사는 것이 박 회장의 건강비결”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경영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LG경제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국내 30대 기업 CEO의 평균 재임기간(2010년 기준)은 고작 3.2년이다. 글로벌 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글로벌 150대 기업의 CEO 재임기간은 6.1년에 불과하다. 더구나 CEO의 재임기간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05년 국내 30대 기업 CEO의 재임기간은 4.2년이었다. 5년 만에 1년이 짧아졌다. 미국과 유럽은 각각 8.9년, 6.5년이었다.

젊은 직원과 소통하는 박승복
실제로 안타까운 일도 있다. 판케 BMW 전 회장은 탁월한 경영 능력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있다. 2000년대 초반 4년 간 BMW CEO로 재임하면서 경쟁사인 메르세데스 벤츠를 멀찌감치 따돌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판케 전 회장이 BMW의 ‘상징’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는 퇴임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이유는 나이였다. BMW가 ‘60대 CEO 제한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많다고 경영일선에서 물러서는 건 어쩌면 불합리한 일인지 모른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경영 세레나데를 잔잔하게 부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촛불은 꺼지지 않아야 촛불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노장도 마찬가지다.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기업은 물론 국가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기현 객원기자 lkh @ 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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