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의 종착역에는 알찬 열매가 열리기를…

문재인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철학과 스타일은 결이 다르다.[사진=연합뉴스]
문재인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철학과 스타일은 결이 다르다.[사진=연합뉴스]

2007년 노무현 정권 말기 때 일이다. 참여연대, 민주노총 등 노동 시민단체들은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당시)에게 “최악의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여한다. 시상식은 열리지 않았지만 유 장관이 주도한 국민연금 개혁에 낙인을 찍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유시민의 연금개혁은 세월이 갈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로부터는 역대 최고의 장관으로 꼽힌다. 그의 연금개혁으로 세 집단이 이익을 봤고, 한 집단만이 손해를 봤다. 

첫째, 미래세대가 이익을 봤다. 둘째, 노동자조차도 되지 못하는 가난한 노인들이 수혜자가 됐다. 셋째, 평균 미만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혜택을 입었다. 반면, 고임금을 받는 장기근속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손실을 입었다.

노무현 정권 당시 한 누리꾼이 ‘국민연금 8대 비밀’을 올리자 국민연금 폐지론이 비등했고, 국민의 70%가 넘게 연금개혁에 반대했다. 논란 끝에 기금소진 시점을 2047년에서 2060년으로 늦췄고, 연금보험료율은 9%로 유지하되 급여율은 60%에서 40%로 줄였다. 절반의 성공에 그친 개혁이지만 유 장관이 당시 야당이었던 새누리당과 손잡고 ‘더 내고 덜 받는 안’을 밀어붙인 결과였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를 승계했다지만 철학과 업무 스타일은 결이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보고한 연금개혁안에 격노하며 퇴짜를 놓았다. 보험료 인상이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다.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으로 청와대 신임 사회수석에 김연명 교수를 임명했다. 일각에서는 김 수석 기용을 위해 경제 투톱인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동연 경제 부총리를 서둘러 교체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연명식 국민연금 개혁의 핵심은 ‘덜 내고, 더 받는’ 방식이다. 우선 소득대체율(생애 평균소득 대비 연금 수급액)을 50%로 높여 국민들이 노후에 더 받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더 많이 주고 덜 걷으면 결과는 뻔하다. 전문가들은 보험료율을 현행대로 유지하고 소득대체율만 50%로 올리면 2054년이면 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추산했다. 국민연금 개혁에 대한 희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문재인 정권에는 유시민 같은 장관이 없는 게 문제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이 노무현 같은 대통령이 아닌 게 문제다. 노무현은 연금개혁을 위해 기꺼이 바람막이가 됐고 직접 총대를 멨다. 지지층의 반대에 맞서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을 밀어붙인 노무현을 보면 그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 된다.

100억 달러 규모의 ‘파주 LCD 클러스터’는 노무현 대통령이 앞장서 규제개혁에 나선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수도권 규제에 따라 대기업 공장 신증축이 제한돼 있었고, 휴전선 근처 군사지역이어서 제약조건이 많았지만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자 꼬인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LG디스플레이가 LCD 출하량을 기준으로 글로벌 1위 기업으로 발돋움한 배경에는 노무현 정부의 규제개혁 노력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익을 앞세운 실용의 지도자라면 문 대통령은 이념형에 가깝다. 악역惡役을 요리조리 피하며 쓴 약은 삼키지 않으려 한다. 야당이 협조해주겠다는 데도 지지기반인 시민단체와 노동단체는 물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조차 설득하지 못한다. 가진 자와 없는 자, 재벌과 서민, 서울 강남과 지방, 보수와 진보로 분열시켜 세상을 재단하니 미래가 보이질 않고, 개혁은 실종됐으며, 관용이 비비고 설 자리는 더구나 없다.

‘좋은 게 좋다’ 라는 말이 있지만 경제에는 통하지 않는다. 경제 투톱을 바꿔놓고 가던 길을 계속 가겠단다. 그렇게 하려면 왜 바꿨는지 궁금하다. 만루 홈런을 맞은 뒤에는 이전 투수와는 완전히 격이 다른 구질의 투수로 역전의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2기 경제팀이 홍남기 부총리 ‘원톱’이라고 청와대는 강변했지만, 결국은 문 대통령 원톱으로 보는 게 맞다.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어야 정책이 유연해지고 시장의 심리도 변할 수 있다. 지금의 위기는 한마디로 지도자의 리더십의 위기다.

기업이 국가 경쟁력을 잃어가고, 실업자는 거리에 넘쳐난다. 서민을 위한다는 선의善意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레일 위로 고속열차가 달린다. 장밋빛 환상을 갖고 출발한 열차의 종착역이 낭떠러지가 되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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