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질환에 걸린 한국경제

1998년 외환위기와 지금의 경제위기는 다른 점이 많다. 사진은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의 한 장면.[사진=더스쿠프 포토]
1998년 외환위기와 지금의 경제위기는 다른 점이 많다. 사진은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의 한 장면.[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로 곤두박질쳤던 당시를 정면으로 비춘다. 경제기자로서 현장을 지켰던 필자는 외환위기가 터진 다음에 위기를 예언했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모두 허풍쟁이라고 단언한다. 누구도 한국이 구제금융을 지원받을 정도라는 사실을 예단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또 하나. 외환위기의 터널을 그렇게 빨리 돌파할지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영화는 미국 정부와 IMF와 한국 정부, 재벌과 서민, 지도층과 국민들을 지나치게 대결구도로 몰아갔다는 면에서 현실성이 다소 떨어진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그린 영화 ‘빅쇼트’ 보다 박진감이 덜해서인지 영화 상영 중 코를 고는 이도 있었다. 영화에서는 미국이 한국을 신자유주의 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한 음모라는 것을 암시하고 부동산과 주식투자로 돈을 번 사람을 비난하지만 지금의 잣대로 비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시에는 한국이 IMF 체제에서 벗어나려면 20~30년은 걸릴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배했으니까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의 뇌리에선 ‘지금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보다 과연 나은가’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1997년보다 상황이 훨씬 나쁘다고 본다. 첫째, 1997년의 위기는 급성폐렴처럼 찾아왔다. 위기는 새로 등장한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경제체력은 여전하니 때마침 국제경기의 훈풍을 타고 한국경제는 곧바로 급상승가도를 달렸다. 외국 언론은 한국의 외환위기를 ‘숨겨진 축복’이라고 했다. 외환위기가 오히려 구조조정의 기회가 되었다는 부러움 섞인 표현이었다.

이에 비해 2018년의 경제위기는 만성질환이다. 실업률은 10월 기준으로 2005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설비투자도 줄고 생산지표도 좋지 못하다. 반도체 호황과 정부지출 확대가 한국경제의 취약점을 잠시 가리고 있을 뿐 이미 위기에 접어들었다. 

둘째, 위기의 내용이 다르다. 1997년은 동남아에서 시작된 일시적인 경제위기였을 뿐 미국ㆍ중국ㆍ일본ㆍ유럽 등 주요 교역대상국의 경제는 건실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 경제위기가 오면 퍼펙트스톰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ㆍ유럽경제가 올해보다 좋아지기 어렵고, 특히 중국의 위험요인인 기업부채와 부동산 버블이 터질 경우 한국이 어떤 후폭풍에 시달릴지 가늠할 수 없다. 1500조가 넘는 한국의 가계부채와 사상누각처럼 쌓아올려진 부동산 거품은 위기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은 외채를 내 손으로 갚겠다며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사진=뉴시스]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은 외채를 내 손으로 갚겠다며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사진=연합뉴스]

셋째, 경제철학의 차이로 빚어진 위기에 대한 대응방식이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이헌재 금융감독원장 등 이 시대의 대표적인 엘리트 관료들이 구조조정을 집도했다. 국민들은 고통스러웠지만 ‘금모으기 운동’ ‘명예퇴직’ 등을 통해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다. 위기에도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강해졌다.

지금 정부는 어떤가.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자동차는 생산이 다시 증가하고, 조선분야도 세계1위를 탈환했다”며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는 3분기 영업이익이 76% 감소한 어닝쇼크에 빠졌고, 조선은 수주량이 2007년의 20%에도 못 미치는 데 이런 말은 생뚱맞기까지 하다.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은 “단락적으로 반복되는 경제위기론은 개혁의 싹을 미리부터 잘라내는 것”이라 했다.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건전한 비판마저 음모론으로 몰아 아예 귀를 닫겠다는 뜻이다. 위기가 왔는데 위기가 아니라고 하니 적절한 처방이나 투약 수술은 아예 할 생각이 없다. 경제를 시장이 아닌 이념 차원에서 접근한 탓이다. 

현 정부는 현재의 경제상황을 위기가 아니라고 우기면서도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슷한 사람들로 교체했다. 만루 홈런을 맞고 똑같은 구질을 갖고 있는 투수로 교체하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서 “위기는 반복되고 인생은 선택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아인슈타인은 ‘미친 짓(Insanity)이란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문재인 정부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볼 때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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