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제❶장 여수

이순신은 왜의 침략에 대비해 여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지휘소(진해루)를 설치했다.[사진=뉴시스]
이순신은 왜의 침략에 대비해 여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지휘소(진해루)를 설치했다.[사진=뉴시스]

32살에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의 관직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변방을 떠돌며 승진과 강등을 반복하며 전전긍긍했죠. 그런 이순신이 47세가 돼서야 처음으로 장군의 직위를 가지고 부임한 곳이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입니다. 공식 직위는 정3품에 해당하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지 않았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선은 나름 시스템을 갖춘 국가였습니다. 일부에선 일본의 침략을 꼼꼼하게 대비했습니다. 봉화를 정비하고 흐트러진 군비를 점검하는 식이었습니다. 전라좌수사에 발탁된 이순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임진왜란 1년 전에 부임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여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진해루에 지휘소를 설치한 것은 단적인 예입니다.

참고로 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1599년 4대 통제사 이시언은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진남관을 건립했습니다. 그후 절도사 이도빈이 1664년에 개축했지만 1716년에 화재로 불타버렸습니다. 그러자 전라좌수사였던 이제면이 1718년에 이순신 순국 120년을 기려 다시 지었습니다. 진남관이라는 이름은 남쪽을 눌러 진압한다는 뜻입니다. 왜곡의 도발을 강하게 눌러버리겠다는 의지가 선연하게 느껴집니다.

이후 건물의 용도가 객사客舍로 바뀌었습니다. 객사는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들이 출정할 때 머무르는 장소입니다. 어쨌든 진남관은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큽니다. 진남관은 규모가 거대한 반면 구조가 단순하지만 묘한 감동을 전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활동하던 때의 건물은 아니지만 그의 영혼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진남관 앞에서 등을 돌려 바라보면 곧바로 여수 앞바다가 보입니다. 

다시 임진왜란 전 이순신의 활동 이야기를 해보죠.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나갔습니다. 「난중일기」의 첫번째 권인 임진일기를 읽다보면,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앞날을 준비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합니다. 

진남관과 여수 앞바다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인재가 모이고 길러지는 보금자리가 됐습니다. 거북선이 만들어졌고, 목숨을 바쳐 나라와 백성을 지켜낼 수군들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순신의 기적적인 승리와 영광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진해루로 나가 공무를 본 뒤에 군관들에게 활을 쏘게 했다. 아우 여필을 전별했다. –임진년 4월 초6일 「난중일기」 중 임진일기 / 우수사 및 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계사년 5월 초4일, 「난중일기」 중 계사일기 /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진해루로 자리를 옮겨 공무를 본 뒤에 배에 올랐다. –계사년 5월 초7일 「난중일기」 중 계사일기 <다음호에 계속> 
장정호 교육다움 부사장 passwing7777@naver.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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