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정치가 지나치게 군에 개입하는 건 순리가 아니다. 사진은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사진=뉴시스]
정치가 지나치게 군에 개입하는 건 순리가 아니다. 사진은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사진=뉴시스]

그곳은 차라리 무덤덤했다. 포화가 소나기처럼 퍼부어지고, 뼈와 살이 흩어지던 아비규환의 현장은 역설적으로 처연하게 아름답기까지 했다. 영하 10도가 넘는 차가운 북풍이 비수처럼 날아들던 2018년 12월의 어느날, 필자는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의 화살머리고지 일대의 남북도로가 연결되는 지점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비무장지대 내 남한의 북쪽 끝과 북한의 남쪽 끝이 연결되는 지점은 도로의 색깔만 조금 다를 뿐 남과 북은 하나였다. 길이 이어진 3㎞는 65년 전 피비린내 나는 상흔을 지우려는 듯 북쪽의 도로는 흙으로 덮였고, 남쪽의 도로에는 쇄석이 깔려 있었다. 멀리 북한 측 초소에 중장비 몇대가 서 있었다.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가며 북측에 건네준 중장비 중 일부라고 한다. 
 
화살머리  유해박물관 GP에서 조금 멀리 건너다보이는 곳에 백마고지가 있다. 산의 형상이 말 같아서 붙였다는 이름이라는데, 포격으로 풀 한포기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허연대가 서 있었다.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가며 북측에 건네준 중장비 중 일부라고 한다. 

화살머리 유해발굴단 GP에 전시된 총알 자국이 선명한 수통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조그만 수통에 30여발이 맞았다면 그 군인의 몸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총알이 박혔을까. 한때는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 아들이었던 분들이 거기에서 백골로 누웠거나 이미 풍화돼 흔적조차 사라졌다. 지뢰제거 작업 중 발견된 뼛조각과 뒤집혀진 군화가 휴전 직전 처절했던 당시의 전투를 웅변한다.

휴전 직전 인근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필자의 아버지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때로는 울먹이며 말했다. “이곳에서의 삶과 죽음은 이웃처럼 하나였다”고. 비무장지대에서 65년간 방치된 유해는 무려 12만3000여구에 달한다고 한다. 속살을 드러냈다고 해서 백마고지라고 했단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화살머리 고지, 공작새 능선, 백마고지 일대에서 조국의 이름으로 목숨을 바쳤을까.

남북 군사합의서를 계기로 ‘안보파탄’에 대한 논란이 크다. 비무장지대 남북도로 연결만 해도 그렇다. 유사시에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평화는 과정이 아닌 결과적 상황이다. 희대의 세습 독재자와 평화협상은 성공한 사례가 없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은 채 평화무드를 조성함으로써 한미동맹과 방위태세의 이완을 노리고 있다. 자칫 북한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일촉즉발의 전쟁위협과 긴장완화라는 화해의 제스처가 공존하는 이율배반적인 시대에 주적主敵 또한 모호해졌다.

최전방을 찾기 전까지만 해도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전방의 군인들은 늠름했다. 군단장ㆍ사단장부터 갓 입대한 병사까지 자신감이 넘친다. 군사기밀이라 충분히 소개는 못하지만 비무장지대에 연결된 도로 역시 유사시에 곧바로 조치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는 전유광 육군 제5사단장의 설명에는 진정성이 담겨있었다. 병사들은 정세가 언제 어떻게 변하든 자신이 근무하는 이곳을 사수하고 제대하는 것이 군인으로서 시작과 끝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혼돈의 시대에 나라를 온전히 지키려면 먼저 군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 군은 충분히 강하다. 남북한의 군사력 균형은 1974년 경제력이 역전되면서 한국이 압도적 우위에 있다. 북한이 대화에 나오는 것은 우리 군이 강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꼽힌다. 문제는 정치다. 5ㆍ16 이후 군의 과도한 정치 개입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정치의 지나친 군 개입이 문제다. 정치가 군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정치논리로 휘두르게 되면 유사시 싸워서 이길 수 없는 군대로 전락하게 된다.

두번째, 군을 명예롭게 해줘야 한다. 군인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담보로 한 직업이다. 그냥 월급 받는 직업이 아니라 국가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숭고한 사람들이다. 미국에서는 여객기에 현직 군인이 타면 1등석을 양보하는 사례가 많다. 자리 양보를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군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대군인들은 자랑스럽게 군복을 입고 다니기도 한다. 이제 우리 사회가 군인을 재평가하고 다시 감사해야 할 때가 됐다고 본다.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돌연한 죽음이 가슴 아프다. 검찰은 기무사령관 시절 세월호 유족에 대한 사찰을 수사하면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가는 이 전 사령관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위협을 가하거나 도주위험도 없는 3성 장군 출신을 그렇게까지 망신을 줘야 했을까. 장군에게 모멸감을 안기면 그 수치감은 모든 장병에게 전해진다. 군이 없으면 검찰인들도 존재할 수 없다. 문득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말이 생각난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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