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더 씬 레드라인 ❸

전쟁의 참상은 인류 시작과 함께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원죄와 같은 현상이다. ‘더 씬 레드라인’은 2차 세계대전 중 남태평양의 과달카날 섬에서 벌어진 처절한 살육전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 그러나 테렌스 맬릭 감독이 고발하는 전쟁의 모습은 엄밀히 말해 일반적인 전쟁의 모습이라기보다 ‘현대전’의 ‘기계화된 살육’의 참상이다.

전쟁의 참상은 인류 시작과 함께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원죄와 같은 현상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전쟁의 참상은 인류 시작과 함께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원죄와 같은 현상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우리가 찬미해 마지 않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 결과물은 어쩌면 전쟁과 살육에 가장 먼저 접목되고 실용화된다. 기계문명의 발달은 기계화된 살육으로 직결된다. 노벨이 광산개발을 위해 발명한 TNT(trinitroto luene)는 곧바로 인마살상용으로 둔갑하고 라이트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자마자 그 비행기에 노벨의 TNT를 싣고 적진을 향해 날아갈 궁리부터 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생산의 근대화는 무기의 대량생산과 대량살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계화된 살육의 진정한 재앙은 살상능력의 발전 그 자체보다는 살상의 ‘비인간화’에 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이 칼과 창을 들고 서로 맞부딪쳐 상대의 얼굴과 눈을 보면서 베고 찔러야 하는 전쟁에서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인 연민과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살육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원거리에서 적진을 향해 폭격과 포격, 그리고 사격을 하는 병사들은 그러한 두려움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영화 속 일본군의 진지를 향해 돌진하는 미군 병사들이나 그들을 향해 참호 속에서 죽어라 총질을 하는 일본군 병사들이나 모두 상대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자신의 총에 맞아 사지가 잘려 나가고 피를 쏟으며 죽어 나가는 ‘인간’의 고통도 느낄 수 없다. 자신의 행위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항공모함에 앉아 수만명의 인간을 쓸어버릴 작전을 세우는 장군들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기계문명의 발달은 기계화된 살육으로 직결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기계문명의 발달은 기계화된 살육으로 직결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렇게 과달카날 작은 섬에서 서로 시치미 떼고 수만명의 병사가 죽어나간다. 얼마 전 KT 통신의 불통 사태로 혼란이 야기됐을 때 어떤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가 ‘우리는 혹시 삐삐 시대에서 멈췄어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멘트를 남겼다. 과달카날 섬에서 미군과 일본군이 칼과 창을 들고 ‘원시적’ 전쟁을 치렀더라면 그토록 많은 생명이 처참하게 희생되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신형폭탄’이라 불리던 원자폭탄은 기계화된 살육의 전형을 보여준다. 미 공군 조종사 폴 티베츠(Paul Tibbets)는 B-29 전폭기에 ‘리틀보이(Little Boy)’로 명명된 앙증맞은 이름의 신형폭탄을 싣고 히로시마로 날아가 투하한다.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러 가는 자신의 전폭기에 페인트로 ‘에놀라 게이(Enola Gay)’라는 자신의 어머니 이름까지 써 넣는다. 그렇게 8월 6일 아침, 한순간 히로시마에서 9만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며칠 사이 10만명 가까이 죽어간다.

후일 티베츠 대령은 자신이 투하한 폭탄이 원자폭탄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어갈지 몰랐다고 했다지만, 그것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수만명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 죽음의 폭격기에 ‘감히’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을 그려 넣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티베츠 대령의 손에 칼을 쥐여주고 직접 100명을 죽이라고 한다면 그가 과연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어머니 이름이 새겨진 칼로 죽일 수 있었을까. 아마 단 10명이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10명을 찔러 죽이든 쏘아 죽이든 때려죽이든 죽인다면 아마도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악령이 아닌 인간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기계화’는 20만명을 죽이고도 멀쩡하게 밥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아갈 수 있게 한다.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은 기계화된 살육의 전형을 보여준다.[사진=뉴시스]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은 기계화된 살육의 전형을 보여준다.[사진=뉴시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유류세 인상’이라는 ‘기계화된 정책’을 내놓았다가 그로 인해 고통받게 된 프랑스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다. 기계화된 사고에는 ‘프랑스의 영광’이라는 ‘목표’만이 있을 뿐 ‘인간’은 사라지고 없다. 아마도 유류세 인상으로 인해 고통받을 시민들의 얼굴과 눈을 들여다보고는 차마 내릴 수 없었을 결정을 기계적으로 내린 업보인지도 모르겠다.

‘기계화’는 기계를 만드는 인간의 의식까지 기계화하고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게 하며 결국 자신도 기계가 된다.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전쟁도 ‘할 만한 것’이 되고 자신이 구상하는 어떠한 정책도 ‘해볼 만한 것’이 된다. 인간이 기계나 ‘개ㆍ돼지’쯤으로 여겨지는 기계화 시대의 공포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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