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제1장 여수❸

태종 이후에 만들어진 거북선은 시대나 상황ㆍ지역에 따라 모양이나 성능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이런 이유로 거북선을 사진 찍듯이 완벽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최대한 실물에 가깝게 복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원된 거북선은 당시의 기록대로 실제로 작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난중일기」 첫권 첫번째 기록이 어머니의 안부였을 정도로 이순신의 효심은 지극했다.[사진=뉴시스]
「난중일기」 첫권 첫번째 기록이 어머니의 안부였을 정도로 이순신의 효심은 지극했다.[사진=뉴시스]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
전남 여수의 ‘이순신 자당 기거지’는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번이나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가눌 수 없다. -임진년 1월 초1일 「난중일기」 중 임진일기

맑음. 아침에 조이립趙而立을 전별하고 객사 대청에 나가 공무를 본 뒤, 서문의 해자垓子 구덩이와 성벽을 더 올려 쌓는 곳을 순시했다. 승군들이 돌 줍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 우두머리 승려에게 곤장을 쳤다.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羅將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다행이다.-임진년 3월 초4일 「난중일기」 중 임진일기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발령받아 여수로 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직 아산에 계셨습니다. 「난중일기」 첫권 첫번째(임진년 정월 초하루) 기록이 어머니의 안부였을 정도로 이순신의 효심은 지극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도 어머니는 아산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난중일기」의 초반에는 심부름꾼을 통해서 아산에 계신 어머니의 안부를 주고받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와 평안도 일부를 제외한 조선 전체가 전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순신 장군이 있던 여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의지인지 이순신 장군의 의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년인 1592년, 그리고 이듬해인 계사년 1593년까지도 어머니가 아산에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1593년 겨울에 여수 고음천으로 내려오신 것 같습니다.

유교는 효孝를 매우 중시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유교의 효를 가족 중심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공자가 말한 효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에서 그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일 뿐이라면 공자께서 굳이 강조하지 않으셨겠지요.

공자가 바랐던 건 개인적인 효심이 사회적인 배려와 예절로 확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가르침이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억압으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이순신은 달랐습니다. 그의 애틋한 효심과 가족애愛는 백성들과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장됐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장정호 교육다움 부사장 passwing7777@naver.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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