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레이팅 역효과

바야흐로 5G 시대. 우리는 ‘초연결 사회’를 앞두고 있다. 물론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도 국민들은 가계통신비 부담이 크다고 울상인데, 5G 시대가 본격 열리면 지금보다 통신비가 더 높아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등장한 해법이 ‘제로레이팅’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이통3사의 지배력이 커지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제로레이팅의 역효과를 분석했다. 

이동통신업계는 5G 망 구축 비용 분담을 위해 제로레이팅 제도를 활성화하자고 주장한다.[사진=뉴시스]
이동통신업계는 5G 망 구축 비용 분담을 위해 제로레이팅 제도를 활성화하자고 주장한다.[사진=뉴시스]

2018년 12월 2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통신사ㆍ제조사ㆍ인터넷기업 관계자, 학계ㆍ연구기관 전문가, 소비자ㆍ시민단체, 정부 관계자 등이 모였다. ‘5G 통신정책협의회’의 세번째 회의를 열기 위해서다. 이들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5G 상용화에 따른 여러 부작용을 분석하고 집단지성으로 솔로몬의 해법을 찾는 거였다. 이날의 주제는 ‘제로레이팅(zero rating)’이었다.

제로레이팅은 쉽게 말해 ‘공짜 데이터’다. 값비싼 데이터를 공짜로 만드는 주역은 둘이다. 데이터가 오가는 망을 제공하는 이동통신3사. 그리고 데이터를 활용해 소비자가 즐길 수 있는 동영상ㆍ게임과 같은 콘텐트를 만드는 콘텐트 제작사다. 콘텐트 기업이 “데이터 사용료를 소비자 대신 우리가 내겠다”고 하면 이통사가 “OK”를 외치는 식이다. 

콘텐트 기업이 소비자의 막대한 데이터 비용을 부담하게 되지만, 나쁠 건 없다. 점유율 다툼이 치열한 시장이라면 ‘가격 경쟁력’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쥘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상황도 있다. 이통3사가 자사 가입 고객을 늘리기 위해 특정 인기 콘텐트 서비스의 요금을 감면하는 식이다. 누가 내든 소비자 입장에선 데이터가 무료다.

제로레이팅이 5G 시대의 핫이슈로 떠오른 덴 나름의 이유가 있다. 5G의 최대 전송속도는 20Gbps로 LTE(1Gbps)의 20배에 달한다. 속도가 빠른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만큼 데이터 사용량도 늘어난다. 통신비 인상과 직결된다.

이통3사는 맘 편하게 통신비를 올리기 힘들다. ‘가계통신비 인하’라는 확고한 정책 목표를 갖고 있는 정부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선택약정할인율 상향’ ‘취약계층 요금감면’ 등이 실현됐고, 정부의 보편요금제 법안 도입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요금제 개편안을 내놨다.

그렇다고 LTE와 비슷하게 요금제를 구성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장 이통3사는 5G 주파수 경매로 3조원이 넘는 돈을 썼다. 통신망 구축도 ‘쩐錢의 전쟁’이다. 증권가는 2018년 이통3사 설비 투자 합계가 총 5조75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2019년엔 이보다 약 25% 늘어 7조원을 상회할 것으로 내다봤다.

급증하는 트래픽 때문에 추가 투자 없이는 서비스 품질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워서다. 소폭이라도 요금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인데,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솔루션이 제로레이팅이다. 날로 늘어나는 데이터 부담을 고려하면, 제로레이팅은 소비자와 사업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전략이다.

데이터가 공짜라면…

하지만 제로레이팅의 세계는 말처럼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제로레이팅이 5G 통신정책협의회의 테이블에 오른 건 이 때문이다. 윤철한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사무국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제로레이팅 서비스는 이통3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통신비 인하 효과가 거의 없다. 소비자가 대부분의 서비스를 제로레이팅으로 감면받는다 해도 그 통신비용은 결국에는 광고비용이나 상품 또는 서비스 생산원가로 전가될 게 뻔해서다. 오히려 그 속에는 시장의 공정경쟁을 방해하고, 독점을 합법화하는 문제점이 숨어 있다.”

더구나 제로레이팅은 자본력을 갖춘 소수의 콘텐트 대기업만 시도할 수 있는 서비스다. 당장 요금 분담이 어려운 중소 콘텐트 업체에게 제로레이팅은 그림의 떡이다. 이통3사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높다. 이통3사와 제휴한 콘텐트 기업만이 고객 확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서비스 사업자와 제로레이팅 협약을 할 것인지를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통신사가 될 공산이 크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어떻게든 투자를 받아 제로레이팅 서비스를 시도한다 해도, 스타트업 입장에선 대기업인 이통3사와 공정한 거래를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이통3사가 정말 투자여력이 없는 가운데 통신망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면 통신업계 전체에서 논의할 내용이지, 특정 기업과 서비스와만 부담을 나누자는 건 이치에 어긋난 논리”라고 꼬집었다.

이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긴 하지만 과기부 입장은 애매모호하다. “자본력 있는 콘텐트 업체들의 독점은 우려되지만, 제로레이팅 서비스 자체엔 특별한 문제가 없다.” 이번 3차 회의에서도 설왕설래만 거듭했을 뿐, 정책 방향의 실마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빈틈이 생기자 이통3사는 이미 제로레이팅을 적극 활용 중이다. 처음엔 계열사 서비스에 주로 적용했다. SK텔레콤은 자회사 인터넷 쇼핑몰 11번가와 모바일 내비 ‘T맵’ 데이터 이용료를 면제하고 있고, KT와 LG유플러스도 자사 내비 ‘원내비’ 데이터를 무료로 제공하는 식이다.

설자리 좁아지는 스타트업

정부의 통신비 인하정책이 본격화한 지난해부턴 제로레이팅을 외부 제휴사로 확대했다. 최근엔 데이터 소모가 큰 게임과 동영상 콘텐트에 앞다퉈 제로레이팅을 적용하고 있다. SK텔레콤은 인기 게임 ‘포켓몬고’ 데이터를 무료화했고, LG유플러스는 G마켓과 제로레이팅 제휴를 맺고 이용자 데이터 부담을 낮춘 바 있다.

윤철한 국장은 “5G 상용화가 본격화할수록 이통3사의 제로레이팅 생태계 구축은 넓어질 것”이라면서 “그때가 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스타트업ㆍ중소기업들의 안전장치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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