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 부는 그랩 효과

동남아 젊은이들은 ‘나도 안 될 거 뭐 있나?(Why not me?)’라는 태도로 무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창업한 그랩의 성공 효과다.[사진=뉴시스]
동남아 젊은이들은 ‘나도 안 될 거 뭐 있나?(Why not me?)’라는 태도로 무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창업한 그랩의 성공 효과다.[사진=뉴시스]

쿠알라룸푸르는 교통체증과 택시요금 바가지로 유명한 도시였다. 특히 외국인에게는 미터기를 적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몇배씩 승차요금을 내게 만드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지난 연말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필자는 놀라운 교통혁명을 목격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차량공유플랫폼을 처음 선보인 ‘그랩(Grap)’은 시민들을 교통지옥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스마트폰에 깔린 앱으로 호출하면 기사 얼굴과 차량번호가 뜬다. 승낙을 하면 대부분 5분 내에 정확히 도착한다. 새벽 3시에도 호출해도, 외진 관광지에서 불러도 기다렸다는 듯 차가 나타났다. 요금이 파격적으로 저렴하고 승차거부도 없었다. 운전자 신원이 확인되니 이처럼 안전할 수 없다.

고작 차량공유서비스 하나 갖고 호들갑을 떤다고? 그렇지 않다. 이를 계기로 말레이시아가 창업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그랩 이펙트(말레이시아에서 창업한 차량공유업체 그랩 효과)라고 불리는 사회 분위기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비결이다. 그랩의 출발은 하버드 출신 학생이 창업한 동남아 토종기업이었지만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글로벌 공룡인 우버의 동남아 사업권까지 삼켰다. 지난해 매출 1조1000억원, 기업가치 6조6000억원에 달한다.

그랩은 2014년 싱가포르로 본사를 이전했지만, 최근 말레이시아에 연구개발센터 설립을 발표하는 등 말레이시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랩 성공신화를 계기로 젊은이들이 ‘나도 안될 거 뭐 있나?(Why not me?)’ 태도가 퍼졌다. 동남아 최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업체인 아이플릭스(3400억원), 중고차 거래 플랫폼인 카썸(308억원), 핀테크 업체 지넥수(191억원), 카오딤(125억원) 등이 대규모 자금을 유치하고 유니콘(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큰 성공을 거둔 스타트업의 통칭)으로의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택시업계는 타격을 입었다. 200여 명의 택시기사들이 말레이시아 재무부 앞에서 항의집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량공유서비스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택시업계부터 반성하라고 꾸짖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국민 편의가 최우선이고 차량공유서비스는 세계적인 현상이니 폐지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차량공유서비스에게도 택시와 같은 규제사항을 신설해 양쪽 모두에 동일한 법과 규정을 적용하기로 했다.

한국은 세계 첫 공유버스인 콜버스(카풀식 공유버스 앱)를 우버보다 2년 앞서 시작했지만 규제에 막혀 서비스를 중단했다. 정부가 택시업계가 반발한다는 이유를 들어 서비스 시간ㆍ지역ㆍ차종규제에 이어 기존 버스 택시 면허사업자에게만 콜버스 운행을 허용하니 신산업의 뿌리가 잘려나갔다. 정치권은 신산업은 애써 눈을 감은 채 27만명에 이르는 택시기사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국토부 장관이 기존 택시 운전자에 한해 우버 앱을 적용하겠다고 한 것은 기술변화의 본질에 대한 정부 내 인식이 얼마나 ‘한심한’ 수준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전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택시 카풀TF위원장)은 37년 전 금지된 택시합승을 허용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범죄와 바가지요금 시비, 승차거부 등 당시 합승이 왜 금지됐는지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카풀 때문에 허용한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20세기 초 택시의 등장으로 마부와 인력거꾼들은 직업을 잃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공유경제는 택시회사를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공유경제 혁신생태계는 육성하면서 기존 생태계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둘 사이에 조정자역할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은 산업화에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겠다는 각오로 달려왔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은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규제와 이해관계자의 반발로 한걸음도 못 떼고 있다. 원격의료 빅데이터 드론 등 미래 먹거리는 규제에 막혀 질식 상태다. 차량공유(카풀)는 정부의 혁신성장 의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여년 전엔 중국을 가보면 식은땀이 났다. 그들의 변화속도가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제는 동남아에 가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싱가포르는 스마트폰 없이도 지문 등 생체정보로 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태국에선 QR결제가 이미 보편화하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우리가 낮잠을 자는 토끼라면 동남아는 쉬지 않고 전진하는 거북이라는 생각이 든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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