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컵밥거리 걸어보니…
컵밥집 28개 중 2곳 폐업
올해도 2개 폐업할 듯
원룸촌엔 임대 나부껴

노량진 컵밥거리는 분명 예전과 달랐다. 총 28개 중 2개가 줄어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전 10시가 넘을 때까지 가게문을 연 곳은 두세곳 뿐이었다. 12시 공시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음에도 컵밥집 11곳의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경기침체가 노량진을 꽁꽁 얼리고 있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노량진을 찾아가봤다. 

노량진 공시촌은 4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사진=천막사진관]
노량진 공시촌은 4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사진=천막사진관]

공무원 꿈을 품은 청춘들이 모인 노량진 공시촌(노량진 1동),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진 1월 9일 노량진 공시촌은 공시생들이 오전 수업에 들어간 탓인지 아니면 날씨 탓인지 한산했다. 지난해 6월 문을 닫은 노량진 대표 고시식당 ‘고구려’ 자리에 둥지를 튼 PC방 만이 취재팀을 반기는 듯했다. ‘공시생들이 노량진을 떠난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고구려가 문을 닫을 즈음부터다. 매년 9급 공무원 시험에 20만명이 응시할 만큼 ‘공시 열풍’인데 노량진 공시촌은 왜 한파를 맞고 있을까. 흥미롭게도 노량진 공시촌의 흥망성쇠는 경기침체와 관련이 깊다. 

1970년대 입시 학원 위주이던 노량진이 공시족의 성지가 된 건 2000년대 이후다. 경기침체로 취업률이 바닥을 치자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렸다. 노량진에 공무원 학원이 대거 들어서고 학생들이 몰리면서 공시촌도 활기를 띠었다. 식을 줄 모르는 공시 열풍에 노량진 컵밥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2019년. 노량진은 활력을 잃었고, 공시생들은 부쩍 줄어들었다. 경기침체로 이른바 ‘노량진 생활비’가 부담스러워진 공시생들이 하나둘씩 노량진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노량진 생활비’는 대략 100만~150만원선으로 알려져 있다. 사육신묘 거리로 옮긴 노량진 명물 컵밥거리 역시 한산했다. 오전 10시가 넘었지만 문을 연 곳은 두세곳뿐이었다.

14년째 컵밥 장사를 해온 허영옥(70)씨는 “4년 전(2015년) 자리를 옮겨오면서 매출이 줄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면서 “지난해부터 학생들이 부쩍 줄면서 매출이 3분의 1가량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컵밥집이 28개나 됐는데 지난해 2곳이 문을 닫았다”면서 “올해도 2곳이 더 장사를 접으려 한다”며 한숨 쉬었다.

장사를 접겠다는 상인들은 있는데 들어오겠다는 이는 없었다. 철거한 노점 자리에는 벤치가 설치돼 있었다. 12시가 넘어서니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컵밥 상인도 장사 준비를 마치고 학생들을 맞았다. 하지만 컵밥집 11곳은 여전히 가게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한산해진 컵밥거리

안경점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노량진에서 6년째 안경점을 운영 중인 김형욱(48)씨는 지난해보다 매출이 20%가량 줄었다며 하소연했다. “안경점은 결국 노량진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데, 지방에서 올라오는 학생들이 많이 줄었다. 경기가 워낙 안 좋으니 학생들도 학원에서 실강을 듣기보다 저렴한 인터넷 강의(인강)로 갈아타는 경우가 많아서 아니겠나.”

노량진 공시촌 원룸 건물마다 공실이 급증하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노량진 공시촌 원룸 건물마다 공실이 급증하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실제로 노량진에서 만난 학생들 중에는 인강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임용고시를 준비 중인 박혜연(27)씨는 올해부터 실강 대신 인강을 듣고 있다. 박씨는 “월세 50만원에 학원비 · 교재비 · 식비 등 매달 150만원 이상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면서 “아무래도 실강이 더 집중이 잘되기는 하지만, 3분의 1가량 저렴한 인강을 듣기로 했다”고 말했다.

경찰공무원을 준비중인 강성호(26)씨는 함께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들 다수가 최근 고향으로 내려갔다. 강씨는 “같이 공부하던 친구 셋이 본가로 내려갔다. 노량진 생활물가가 저렴하다고 해도, 매달 부모님께 100만원 넘는 지원금을 받기가 죄송스러운 건 사실이다”고 말했다.

이렇게 학생들이 노량진에서 짐을 빼면서 원룸과 고시원에는 빈방이 넘쳐났다. 동작경찰서 뒤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원룸촌에는 ‘방 있음’ ‘공부 방 있음’ 종이가 붙은 집들이 수두룩했다. 10년 전 이곳에서 공시를 준비했던 고성민(38)씨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빈 방을 구하기 힘들 정도로 학생들이 많았다”면서 “서점과 고시식당들이 사라진 걸 보니 고시촌도 예전 같지 않단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노량진 공인중개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학생들이 줄어 원룸 건물마다 빈방이 5~6개씩 된다”면서 “고시원에선 월세를 10만원씩 낮춰 받는 경우도 있지만, 들어가겠다는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공인중개사무소 건너편 라면가게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상가를 싹 리모델링하고 장사를 시작한 지 6개월 됐는데, 가게를 내놨다. 노량진은 물가가 저렴해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먹자골목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낮이고 저녁이고 장사가 안 되니 월세를 밀린 가게도 숱하다.”

장사를 접는 상인들이 생겨나면서 고시촌 소형 상가 중에도 공실이 하나둘 증가하고 있다.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김서형(44)씨도 장사를 접어야 할지 고민이다. 최근 매출이 50~60% 꺾였기 때문이다. 김씨 가게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 있다.

속앓이 심해지는 상인들

그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지난해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그 여파인지 경기가 최악이다”면서 “학생들 얘기를 들어보면 부모님이 보내주는 월 100만원이 넘는 지원금이 끊겨 (고향으로) 내려가는 경우가 많더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임용고시 학원 한곳도 문을 닫았다. 학원마저 규모를 줄이거나 임대료가 저렴한 곳으로 옮기는 추세다”고 한숨 쉬었다.

경기 악화로 노량진 생활비 부담이 커진 공시생들이 노량진을 떠나고 있다.[사진=뉴시스]
경기 악화로 노량진 생활비 부담이 커진 공시생들이 노량진을 떠나고 있다.[사진=뉴시스]

어렵기는 문구점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부터 한곳에서 문구점을 운영해온 심영미(56)씨는 최근 1~2년 새 매출이 3분의 1가량 감소했다. 수험서를 복사하랴 제본하랴 밀려들던 학생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심씨는 “4월에 공무원 시험이 있어, 학생들이 계절별로 들고 나지만 지난해와 올해는 확실히 줄었다”면서 “요즘 같은 연초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로 북적여야 하는 데 거리가 한산하지 않냐”고 말했다.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쌈짓돈을 모아 서울로 올려 보내던 부모들의 주머니 사정이 악화했다. 그 여파는 노량진 상권에 40년 만의 최대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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