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 특약] 소비자, 헌옷으로 ‘스타일’ 창조하다
[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 특약] 소비자, 헌옷으로 ‘스타일’ 창조하다
  • 추호정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
  • 호수 323
  • 승인 2019.01.27 0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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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소비자와 패션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하지만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과연 기술이 침해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 있는가’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능력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질문에 관한 답으로 창의성을 얘기한다. 흥미로운 건 생산만이 아니라 소비에서도 창의성은 새로운 관심거리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일 옷을 입으며 창의성을 발휘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매일 옷을 입으며 창의성을 발휘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창의성은 오랫동안 인간이 가진 고유한 특성으로 여겨져 왔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뜻의 라틴어 ‘creo’에서 유래한 창의성(creativity)은 자연에서 새롭고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인간 활동의 근간이 되는 능력’이다.  

창의성은 생산자의 덕목이기도 했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자는 대량 생산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고, 이를 소비시장에 공급해왔다. 더 새롭고, 더 유용하고, 더 흥미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이를 톡톡 튀는 방법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생산자에게 시장은 열광했다. 그 과정에서 창의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생산자의 특별한 능력’으로 인식됐다.

패션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출 난 감각을 소유한 천재적인 디자이너가 창조한 패션 스타일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반면 ‘이미 생산된 재화를 선택해 사용하는 자’로 정의된 소비자는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그저 시장에 소개된 제품을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혹은 느리게 선택하는 차이가 소비자의 혁신성을 규정하는 기준이었다. 소비자의 적극적 역할과 역량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세기 후반, ‘소비 창의성’의 개념이 독일 출신의 경제학자 허쉬만(Albert Otto Hirschman) 등에 의해 주창됐다. 그는 소비를 할 때 창의성을 발휘하면 소비와 관련된 여러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비자들이 일상에서 소비 문제를 해결할 때 상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 다양한 창의적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창의성의 핵심 개념인 ‘새로움(newness)’과 ‘기능성(functionality)’은 소비 창의성에도 적용된다고 봤다.
 
 

2000년대 들어 소비 창의성에 관한 연구는 더 다양하게 이뤄졌다. 예를 들어 미국 버지니아대의 버로우즈(James E. Burroughs) 교수와 믹(David Glen Mick) 교수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곧 시작될 파티에 신고 갈 구두에 흠집이 난 것을 발견했을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다양한 참여자에게 묻고, 답변에 따라 창의성 수준을 분석했다.

파티를 위해 2분 후 출발해야 하는 경우와 3시간 후 출발해야 하는 경우를 구분해 시간제약을 설정하고, 파티의 중요성에 차이를 둬서 상황 관여도 효과도 고려했다. 그 결과, 참여자들은 문제해결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적을 때 더 새로운 해결방법을 제안했고, 상황 관여도가 클 때 더 기능적인 해결안을 제안했다. 

 ‘캡슐옷장’을 통한 소비실험 

사실 소비자의 창의성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된다. 간편식으로 설계된 인스턴트 음식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조리해 근사한 요리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선물 포장재나 충전재를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장식해 쓰기도 한다.

패션 소비자의 ‘옷입기’ 역시 마찬가지다. 패션 소비자는 매일 아침 옷장을 열고, 옷장 속에 걸린 옷들을 선택해 하나의 스타일링을 완성한다. 매일 아침마다 창의적 디자인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 창의성이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첫째, 구매가 아닌 사용을 통한 소비문제 해결을 통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소비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일찍이 허쉬만은 소비 창의성의 개념을 사용혁신성과 연결해 새로운 제품의 구매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보유하고 있는 제품을 새로운 방식과 용도로 활용해 소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해진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제품의 구매를 통한 문제해결이 더 익숙해졌다. 계절이 바뀌면 새 옷을 구입하고, 송년회가 다가오면 화려한 외출복 쇼핑에 나선다. 이런 소비행태는 생산과 폐기 과정에서 다양한 환경문제를 야기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반면 창의적 소비자는 이미 사용 중인 제품들을 새롭고 유용한 방법으로 활용해 문제를 해결한다. 창의적인 소비의 과정과 결과는 물질적 제약에도 충분히 풍요로울 수 있다는 거다.

대표적인 게 ‘캡슐옷장(capsule war drobe)’이라는 개념이다. 1970년대 영국의 수지 폭스(Susie Faux)에 의해 소개된 개념인데, ‘몇벌의 기본적인 아이템으로 구성된 옷장’을 의미한다. 캡슐옷장의 개념은 환경과 경제성을 고려한 패션을 지향하는 많은 소비자의 흥미를 자극했고, 다양한 소비실험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필자는 실제로 동료 연구자들과 이와 유사한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다. 옷에 관심이 많은 5명의 여성 소비자를 대상으로 7일간 ‘창의적 옷입기’라는 과제를 3회 이상 진행하면서 그 과정에서의 경험을 일지로 작성하도록 한 거였다. 

실험에 참여한 소비자는 평소와는 다른 시도를 하면서 기존의 옷을 새로운 스타일로 입음으로써 옷의 활용도를 높였다. 특히 주위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에 고무돼 과제수행 자체를 즐기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창의성만 발휘하면 한정된 아이템으로 구성된 작은 옷장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고, 주체적인 소비자로서의 만족감도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소비 창의성이 주는 두번째 함의는 소비주체로서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와 힘을 회복할 수 있다는 거다. 오랫동안 생산과 소비는 분리 혹은 단절돼 있었다. 소비자는 시장 시스템에서 소외돼 있었고, 이미 생산돼 시장에 전시된 제품이 소비생활을 지배했다. 반면 최근의 기술 발달은 창의적 소비자의 역량을 강화하고 지지하는 중요한 동력이 됐다.

SNS를 통해 서로 연결된 개별 소비자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확산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하면 누구나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구체적 산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창의적 소비 지원하는 기업들 

몇몇 혁신적 패션기업들은 이런 소비 창의성을 활용, 시장에서 기회도 만들어내고 있다. 단순한 디자인 요소나 주문자 아이디를 반영하는 마이아디다스(miadidas)와 나이키아이디(nikeID)의 개인화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소비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고도화된 전략이다. 

아디다스가 독일에서 선보인 ‘Knit4you’라는 이름의 팝업 프로젝트도 그렇다. 소비자가 점포를 방문해 자신의 치수를 3D 스캐너로 측정하고, 원하는 색과 모양의 스웨터를 디자인하면 점포에 비치된 니팅 기계로 그 자리에서 제품을 완성해 제공하는 식이다.

기술의 발달은 시장과 거래의 많은 모습을 바꿔 놨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창의적인 소비자의 등장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소비자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파워풀하다. 창의적인 소비를 지원하는 기업이 부각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추호정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 choogo@snu.ac.kr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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