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이후 유통채널 추이 살펴보니…

골목 어귀마다 있던 동네슈퍼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대형마트 출점을 끝낸 대형 유통업체들이 SSM(기업형슈퍼마켓)을 내세워 골목으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SSM의 공세가 뜸해지자 편의점이 골목을 채우기 시작했다. 숱하게 쏟아진 법안과 정책도 동네슈퍼의 퇴출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젠 동네슈퍼의 향수를 그리워하던 사람들의 시선마저 싸늘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동네슈퍼를 살려야 할 이유는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거대자본에 무너진 작은 골목슈퍼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동네슈퍼의 선택은 두가지다. 문을 닫거나 편의점으로 전환하거나.[사진=뉴시스]
동네슈퍼의 선택은 두가지다. 문을 닫거나 편의점으로 전환하거나.[사진=뉴시스]

# 직장인 김나현(32)씨는 요즘 집에 들어가는 길에 왠지 헛헛한 마음이 든다. 5년 넘게 살아온 집 앞 슈퍼가 최근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요새 같은 세상에 보기 드문 이 동네슈퍼는 문 연 지 꼭 30년 만에 폐점했다. 김씨는 “겨울이면 퇴근길에 귤 한 바구니를 사며 주인 아저씨와 안부를 나눴다”면서 “아침 7시부터 밤 11시 반까지 가게를 지키면서도, 하루도 문 닫은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2년 새 슈퍼 양 옆에 편의점이 생긴 후로 장사가 예전 같지 않았다고 하소연하곤 했어요. 동네 사랑방 같던 곳이 사라지니 맘이 좀 그래요.”  김씨는 이제 퇴근길에 편의점에 간다. 허름한 바구니에 담긴 3000원어치 귤 대신 깔끔한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귤을 6000원에 구입한다.|

# 공덕동에서 25년째 슈퍼를 운영해온 오수만(66)씨는 설이 지나면 가게문을 닫기로 했다. 대형마트며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들어서면서 가게 매출이 쪼그라든 건 십수년이 됐지만 동네사람들 덕분에 버텨온 장사였다. 오씨는 “시원섭섭하지만 어쩌겠냐”며 말을 이었다. “몇년 새 이 근방 슈퍼 4곳이 문을 닫았고 그 중 둘은 편의점으로 바뀌었어요. 나나 오랜 동네사람들이야 아쉽겠지만 요새 젊은 사람들은 편리한 편의점을 좋아하니까, 더 버틸 재간이 없더라고요.”

‘동네슈퍼가 죽는다’는 얘기가 나온 건 2008년 무렵이다. 국내 대형마트 수가 20 06년 329개(국내 적정 대형마트 수 250~300개)를 넘어서면서 경쟁력이 떨어지자 대형 유통업체들이 골목으로 진출했다. 선봉은 SSM이었다. SSM은 3000㎡(약 907평) 미만으로 부지 확보가 쉬운 데다 신고제(대형마트는 등록제)로 개설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골목의 잔돈까지 빨아들이겠다는 이른바 ‘페니(penny)전략’이었다.

이들의 전략은 CEO의 발언에서도 드러났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2009년 회사 사보에 “집 밖으로 한발짝만 나가면 이마트가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골목상권 장악 의지를 내비쳤다. 이마트에브리데이뿐만 아니라 롯데슈퍼ㆍ홈플러스익스프레스ㆍGS슈퍼마켓 등이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2006년 292개였던 SSM은 매년 200여개씩 증가해 2011년 1112개로 불어났다. 

한쪽에선 대기업 플랫폼을 활용한 편의점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편의점 대열엔 일부 동네슈퍼도 참여했다. 당시 한국편의점협회는 “2011년 신규출점한 편의점 중 동네슈퍼가 전환한 비중이 9.8%(2011년 11월 기준)”이라고 밝혔다. 대기업 품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골목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한 동네슈퍼가 많았던 셈이다.

남은 동네슈퍼들은 “대기업이 코 묻은 돈까지 쓸어가야겠냐”며 반발했다. 그러자 동네슈퍼를 법으로 지켜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국회에선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 쏟아져 나왔다. 18~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총 136건에 달했다. 국회 문턱을 넘은 법안은 12건에 그쳤지만,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10년부터 상권 보호를 위해 전통상업보존구역 500m(2011년 1㎞) 이내 대규모 점포의 출점이 제한됐다. 2011년 이후에는 대형마트와 SSM의 월 2회 의무휴업, 영업시간 제한 등의 규제가 내려졌다. 2013년에는 대규모점포 개설시 대형 유통업체에 상권영향평가서 · 지역협력계획서를 제출하도록 해 상생의무를 강화했다.

동네슈퍼의 향수를 간직했던 사람들은 '편의성'을 내세운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사진=연합뉴스]
동네슈퍼의 향수를 간직했던 사람들은 '편의성'을 내세운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사진=연합뉴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 동네슈퍼는 살아남았을까. 결과는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최인호(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대형마트ㆍ백화점ㆍSSMㆍ온라인쇼핑은 양적 성장에 성공했다. 2017년 기준 대형마트는 461개로, 2011년 382개보다 훨씬 늘었다. SSM 매장은 같은 기간 1201개에서 1610개로 증가했다.[※참고 : 변종SSM이라 불리는 가맹형 SSM을 포함하면 1만여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형 유통채널은 매출액도 훌쩍 뛰었다. 같은 기간 매출액 증가율은 대형마트 2.4 %, SSM 23%, 백화점 6.2%를 기록했다.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한 건 편의점과 온라인이다. 편의점 점포수는 7년 새 1만8585개 증가해 3만9807개(2017년)에 달한다. 9조2000억원이던 시장 규모는 22조2000억원대로 커졌다. 온라인쇼핑시장도 29조원에서 78조2000억원대로 성장했다.

벽에 부딪힌 개정안

이 통계에서 흥미로운 건 동네 슈퍼마켓도 매출이 늘었다는 점이다. 슈퍼마켓 수는 2011년 8만3186개에서 2016년 6만9577개로 줄어들었지만 매출액은 31조800억원에서 36조3000억원(2017년)으로 증가했다. 슈퍼마켓시장이 덩치 큰 중대형 슈퍼마켓 위주로 구조조정됐다는 방증이다.

결국 거대자본의 골목침투로 피해를 입은 건 가장 밑단에 있는 156㎡(약 47평) 미만의 동네슈퍼였다는 얘기다. 2011년 대비 2017년 동네슈퍼 수는 7만6043개(통계청)에서 5만8463개로 23.1% 감소했다. 편의점이 급증한 2015년 이후 감소율은 7%대로 가팔라졌고 동네슈퍼 1만7580개가 사라졌다.

우리는 왜 동네슈퍼를 지키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숱하게 쏟아진 법안이 유효한 규제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규철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정책위원장은 “동네슈퍼가 경쟁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시장을 대형 유통업체에 내어준 다음 규제한들 효과가 미비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건 동네슈퍼가 있는 상권을 보호해주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현행 유통산업발전법은 상권보호를 위해 전통상업보존구역 1㎞ 내 대규모점포 개설을 금지하고 있지만 전통시장 · 지하상가만을 대상으로 한다. 동네슈퍼처럼 파편적인 골목상권은 보호받지 못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전통상업보존구역뿐만 아니라 상업보호구역(점포 30개 이상 상점가)도 입지 제한을 강화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신 위원장은 “지난해 시행령을 개정해 상점가 지정 기준을 기존 점포 50개에서 30개로 완화했다”면서 “현재로선 상권을 보호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데 정작 법안은 야당의 반대에 막혀 국회 계류 중”이라고 말했다. 

대규모점포 개설시 제출하는 상권영향평가서의 실효성 논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상권영향평가서의 작성 주체가 점포개설자인 대형 유통업체이라서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또한 지자체에 이를 제대로 검토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김영기 소상공인진흥공단 정책실장은 “상권영향평가를 제3의 전문기관이 하고, 지자체 내에 상권영향평가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권영향평가의 제출 기한을 기존 영업일 60일 전에서 건축허가 이전으로 앞당겨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이런 내용을 보완한 개정안(이현재 · 박완수 · 유동수 의원안) 역시 국회에서 낮잠만 자고 있다.

골목상권을 지키기 위한 정부 법안과 정책은 실효성이 없었다.[사진=뉴시스]
골목상권을 지키기 위한 정부 법안과 정책은 실효성이 없었다.[사진=뉴시스]

정부 정책도 헛바퀴를 돌았다. 나들가게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2010년 “SSM에 대응하기 위해선 동네슈퍼가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며 나들가게 사업을 추진했다. 동네슈퍼를 나들가게로 유치하고 간판교체 · 상품재배치 · 시설현대화 등을 지원했지만 효과는 미진했다.

2014년부턴 가격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며 공동구매 · 부가서비스 강화 · 중소유통물류센터 연계 등을 지원했다. 하지만 결과는 초라하다. 2010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나들가게에 예산 963억원이 투입됐지만 문 닫는 가게가 수두룩했다. 2012년 9704개이던 나들가게는 지난해 7777개로 쪼그라들었다(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실 자료). 폐업 이유는 일반슈퍼로 전환(31.6%), 편의점 전환(23.7%), 타업종 전환(27.1%) 등이었다. 나들가게가 일반슈퍼나 편의점 대비 경쟁력이 없다는 방증이다.

법안과 정책이 헛발질을 하는 동안 소비 트렌드는 달라졌다. 편의점 · 온라인 · 대형쇼핑몰이 소비의 중심 장터로 떠오른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네슈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마저 싸늘해지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사라지는 동네슈퍼를 아쉬워하던 사람들의 공감대는 약해지고 있다. “편의점이 편리하고 깨끗한데 굳이 동네슈퍼를 살려야 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다.

그럼에도 동네슈퍼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있다. 무엇보다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대형 유통업체와 영세한 동네슈퍼 상인은 공정한 경쟁을 하기 어렵다. 경쟁에서 밀린 상인들이 퇴출되면 실업자,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을 받아줄 안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동네슈퍼를 비롯한 골목상권이 급격히 쇠락하면 사회적 비용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전태유 세종대(유통산업학) 교수는 “동네슈퍼 상인들은 대부분 영세한 생계형 자영업자인데 이들이 급격히 퇴출되면 사회 피라미드 전체가 무너진다”면서 “동네슈퍼가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게 사회의 역할이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편익을 위해서’도 동네슈퍼가 살아야 한다. 소비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대형 유통업체를 견제할 수 있는 경쟁자가 필요하다. 소비자의 선택권이 다양해져야 가격 경쟁력이 일어나고 물가가 조정된다. 신규철 위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프랑스에선 대형 유통업체 까르푸가 물가를 상승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유통시장을 장악한 까르푸는 더이상 가격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지속적으로 가격을 인상하면서 소비자 피해로 이어진 결과다. 대기업 독과점이 일으킬 수 있는 폐해다.”

대형 유통업체들은 “대형마트 의무휴업이 소비자의 편익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대기업 독과점을 방지해 물가를 안정화하는 효과, 다양한 유통업태가 경쟁하는 유통시장의 건전성을 위해 동네슈퍼가 살아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이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 뿐이다. 이제 동네슈퍼는 생사의 끝자락에 와있다. 어쩌면 지금이 동네슈퍼의 숨통을 틔워줄 마지막 골든타임일지 모른다.
이지원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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