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상권 없는 도시재생의 그림자

도시재생 시대다. 쇠락한 골목길의 풍경을 활력과 정감이 넘치던 과거로 되돌리자는 거다. 닳아빠진 콘크리트길을 새로 닦아 신진 예술가의 작품을 내걸고, 흉물로 전락한 시멘트빌딩엔 색을 입혀 청년창업 공간으로 내주는 식이다. 그런데 지금의 방법으로 골목길을 정말 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골목상권을 어떻게 하자는 대책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골목상권 없이 골목을 살린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역설의 함정을 취재했다.

수많은 도시재생 계획이 강조하는 게 골목길이다. 하지만 정작 골목상권 활성화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계획은 많지 않다.[사진=뉴시스]
수많은 도시재생 계획이 강조하는 게 골목길이다. 하지만 정작 골목상권 활성화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계획은 많지 않다.[사진=뉴시스]

골목길. 도시개발 패러다임의 최신 트렌드인 ‘도시재생’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키워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기존 재개발ㆍ뉴타운은 도심부의 정겨운 골목길을 헐어내고 고층빌딩을 세우는 것이었다. 도시재생은 이런 방식에 폐해가 많았다는 반성에서 태동했다. 이 때문에 도시재생에는 ‘동네로 통하는 좁은 길을 단장하자’ ‘골목상권을 활성화하자’는 계획이 유난히 많다. 쇠락해가는 골목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자는 거다. 

현재 전국 곳곳에서 도시재생이 진행 중이다. 이 사업은 문재인 대통령의 최대 공약사업 중 하나다. 5년간 50조원의 공적재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지자체 중에선 서울시의 추진 속도가 눈에 띈다. 27개 ‘서울형 도시재생 선도 지역’을 선정하고 ‘다시세운상가’ ‘돈의문박물관마을’ 등으로 결과를 냈다. 그렇다면 도시재생은 정말 골목길을 북적이게 만들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방식으론 불가능하다. 강헌수 공생도시상권재생연구소 소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골목길 활성화를 위해선 골목길의 경제적 기반인 골목상권 활성화가 필수다. 그런데 지금의 도시재생은 골목길 풍경을 바꾸는 것에 그친다. 예쁜 벽화를 그리고, 가로수 간격을 촘촘히 하면 뭐하나. 사람들이 골목길에 있는 작은 슈퍼나 문방구에서 지갑을 여는 일은 좀처럼 없다.”

예를 들어보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해 8월 ‘선순환 경제 생태계 구축’ 플랜을 발표했다. 도시재생과 연계해 골목경제 활성화하겠다는 게 목표인데, 방법이 이상하다. 자치단체가 소규모 도시재생이나 집수리 사업 등을 시행할 때 이를 해당 지역의 업체에 맡기자는 것이다. 

박 시장과 서울시 측은 “도시재생 개발이익을 지역기업에 몰아주면 지역 상권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계산을 한 듯하다. 강 소장은 이를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고 꼬집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역 기업이 도시재생으로 얻은 이익을 동네슈퍼에 쓸 거란 보장이 어디 있나.”

서울시가 추진 중인 도시재생사업들도 ‘골목상권 활성화’와는 거리가 다소 멀다. 27곳의 서울시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 중 ‘골목상권 활성화’를 테마로 잡은 건 창3동 뿐이다. 나머지 26곳의 사업지는 골목상권과 접점이 적다. 기존 산업과 연계한 신산업 유치나 청년창업 공간을 마련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골목길을 강조해야 할 도시재생 사업의 방향이 틀어진 이유는 뭘까. 익명을 요구한 한 도시재생 활동가는 “도시재생 사업은 오랜 검토와 차분한 사업 진행이 필수”라면서 “하지만 관官 주도의 도시재생 사업에선 재개발 관성과 보여주기식 행정 때문에 골목상권 같은 덜 민감한 이슈엔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현창용 건축사무소H2L 대표의 설명도 들어보자. “그간 정부, 지자체, 유통 대기업 등 거대 이익집단이 합심해 도시에서 골목슈퍼를 몰아냈다. 곧게 뻗은 고속도로, 대형 쇼핑센터 등을 중심으로 도시를 디자인한 결과다. 문제는 지금의 도시재생을 주도하는 것도 바로 이들이라는 점이다. 늘 해오던 외형변화에 치중한 사업이 도시재생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내 도시재생 사업지 곳곳에선 잡음이 일고 있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사업 본격화에 따라 을지면옥이 철거 위기에 몰렸던 건 대표적 사례다. 골목길을 보호하겠다고 호들갑을 떨더니 되레 기존상권을 위협하는 일도 잦다. 사업지로 선정돼 임대료가 치솟아 이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이다.

해결 방법은 없을까. 프랑스 파리시가 지분 75%가량을 보유한 기업 세마에(SEMA EST)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2004년 민ㆍ관 공동투자로 설립된 이 회사의 역할은 간단하다. 골목상권에 놓인 건물을 매입해 각각의 점포를 상인에게 빌려준다.

건물주가 돼 막대한 부를 쌓겠다는 게 아니다. 특별한 원칙이 있다. 정육점ㆍ빵집 등 시민생활과 밀접하게 맞닿은 상점엔 임대료를 저렴하게 책정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기 위해서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골목에는 천편일률적인 프랜차이즈 업종이 난립하지 못한다. 세마에가 세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 골목상권 운영의 컨트롤타워인 셈이다. 

신통한 파리시 골목상권 솔루션

파리시도 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시는 ‘파리도시기본계획’에 따라 대로변 건물 1층에 위치한 소매업, 수공업 상점 등의 용도 전환을 금지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세마에는 매출 감소로 위기에 몰린 파리 내 고서점 상권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세마에는 파리시 11개 구역 650개의 크고 작은 상점을 영세상인에게 저렴하게 임대하고 있다. 이동주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사무총장은 “세마에가 일부 구역의 임대료 상승을 낮춘 덕에 주변 상권 임대료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면서 “파리 정부가 세마에와 함께 택지개발 단계부터 골목상권 보호를 위한 세심한 전략을 짜고 있기 때문에 추후에도 골목길이 쇠락할 여지가 적다”고 설명했다. 이미 골목상권은 회생의 골든타임을 놓쳤단 지적이 많다. 골목상권 활성화와 밀접한 도시재생 계획은 이를 만회할 기회다. 
김다린ㆍ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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