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라쇼몽羅生門❶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라쇼몽羅生門(1951년)’ 전쟁이 난무하던 일본의 헤이안 시대(794~1185년) 숲속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을 그렸다. 등장인물 모두가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여느 추리극과 달리 이 영화는 서로가 자신이 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도 속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인간은 ‘자기 자신도 속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라쇼몽’은 일본의 대표 문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단편 「라쇼몬」(1915년)과 「덤불속」(1921년)을 원작으로 한 일본의 고전영화다. 아키라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쓴 이 영화는 1951년 아카데미상 특별명예상과 베네치아 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도적 다조마루, 사무라이(이미 죽었으나 무당이 그의 영혼을 증인으로 불러낸다), 사무라이의 아내 그리고 목격자인 나무꾼과 스님은 숲속 살인사건의 피의자 혹은 증인, 참고인으로 관아에 끌려 나오거나 출석한다. 그들의 진술은 비선형적으로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며 주장한다. 심지어 피해자인 사무라이의 영혼은 자신의 죽음이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는 것을 믿어달라고 호소한다.

산적 다조마루는 여자를 겁탈한 후 여자의 요청대로 그녀의 남편과 무사답게 대결해 사무라이 남편을 죽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당한 결투였을 뿐 결코 살인이 아니었다며 당당하다. 여인의 진술은 자신이 겁탈당한 후 자신을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사무라이 남편의 얼굴에 배신감과 치욕감을 느껴 남편을 단검으로 찔렀다고 한다. 무당이 불러낸 사무라이의 영혼은 자신이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사무라이답게 아내의 단검으로 자결했노라고 주장한다.

‘라쇼몽’은 일본 헤이안 시대 숲속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을 그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라쇼몽’은 일본 헤이안 시대 숲속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을 그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러나 사건의 목격자인 나무꾼은 세 사람의 진술이 모두 거짓임을 밝힌다. 그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산적 다조마루가 여인을 겁탈한 후 여인이 두 남자를 부추겨서 대결을 벌이게 했으며 두 남자는 참으로 지질하게 싸우다가 사무라이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왜 이들은 각자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면서까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원작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인간은 자기 자신도 속이는 존재’라는 것에서 그 답을 찾고 있는 듯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자신도 속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산적 다조마루나 여인 모두 자기의 기억마저 왜곡하고 자신을 속여가며 스스로를 보호한다. 심지어 죽은 사무라이는 불려 나온 영혼마저 거짓말을 한다. 그들은 자신의 기억을 왜곡하면서까지 무엇을 은폐하고 싶었을까.

산적 다조마루는 자신이 사무라이와 지질하기 짝이 없는 결투를 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다. 위대한 산적 ‘다조마루님’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치열한’ 결투를 벌인 사무라이의 무술도 대단해야만 한다. 자신이 위대해지기 위해 죽은 사무라이의 검술까지 대단했던 것으로 포장하는 관대함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무라이의 아내는 자신을 겁탈한 산적에게 자신의 남편까지 죽여달라고 청탁한 최악의 여자로 남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이 죽이지도 않은 사람을 죽였다고 살인자를 자청하면서까지 최소한 명예를 아는 도덕적인 여인으로 남고자 한다.

오늘도 인터넷과 언론에는 수많은 ‘진실공방’이 이어지고 있다.[사진=뉴시스]
오늘도 인터넷과 언론에는 수많은 ‘진실공방’이 이어지고 있다.[사진=뉴시스]

죽은 사무라이는 결박된 채 눈앞에서 아내가 산적에게 겁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산적에게 죽는 불행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는 사무라이라는 지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자결했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죽은 영혼이 불려 나와서까지 거짓말을 밀어붙인다. 영혼도 거짓말을 한다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실체적 진실을 가려주리라 믿었던 목격자인 나무꾼도 사건에 연루돼 있어 그의 진술조차 완전히 신뢰할 수 없게 된다. 나무꾼은 사무라이 아내의 값나가는 단검을 훔쳤지만 목격담을 진술하면서 그 부분은 감춘다. 가장 객관적일 수 있는 목격자의 진술도 결국 완벽할 수 없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이기심과 욕망으로 자신들의 기억을 왜곡하며 진실을 미궁에 빠뜨린다. 사건이 벌어졌던 깊은 숲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사건의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늘도 인터넷과 언론에 수많은 ‘진실 공방’이 이어진다. 시체는 있는데 살인자는 없다. 맞았다는 사람은 있는데 때린 사람은 없다. 돈을 준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은 없다. 모두들 법원과 검찰에서 ‘진실을 위해 투쟁할 것이며,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리라’고 목에 힘을 준다. 그리고 판결이 내려진다. 판결문이나 신문기사에 ‘사실事實’이 기록되고, 역사책에 기록된 ‘사실史實’은 있지만, 그 ‘사실’들이 반드시 ‘진실’일까.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없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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