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열 택시운전사의 헌신

서울 도봉구 자원봉사캠프의 이수열 캠프장은 사랑의 택시운전사로 불린다. [사진=오상민 작가]
서울 도봉구 자원봉사캠프의 이수열 캠프장은 사랑의 택시운전사로 불린다. [사진=오상민 작가]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수평을 맞춘다. 인간은 다르다. 돈이든 권력이든 뭔가를 거머쥐면 밑단을 보지 않는다. 가진 자는 더 갖길 원하고, 물욕은 세상을 양쪽으로 쪼개놓는다. 이렇게 탐욕스러운 세상을 외로이 떠받치는 게 있다.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이가 더 못 가진 사람을 위해 헌신獻身하는 것, 역설적 희생이다. 

서울 도봉구 자원봉사캠프의 이수열(68) 캠프장. 그는 ‘사랑의 택시운전사’로 불린다. 고되다는 택시를 몰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있어서다. 한두해만 반짝 그런 것도 아니다. 벌써 30여년째 헌신이다. 더스쿠프(The SCOOP)와 천막사진관이 그를 만났다. 14번째 주인공이다.  

#1장. 자책, 소리 없는 통곡  

동네 뚝방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진창이었다. 전날 내린 비 때문이었다. 가난 탓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던 그날이 떠올랐다.  30여년 전. 그날도 비가 내렸고, 길은 진흙탕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곡哭을 할 순 없었다. 소리 없는 통곡, 그건 자책이었다.  

2시간 전, 그는 맨손으로 일군 ‘침구회사’를 다른 이에게 넘겼다. 직원이 15명에 달하고, 회사차가 넉대나 있었지만 IMF 한파를 이겨내는 건 또다른 문제였다. 

사랑의 택시운전사 이수열씨는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손님을 맞는다. 그는 “택시운전사라면 행복을 선물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사랑의 택시운전사 이수열씨는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손님을 맞는다. 그는 “택시운전사라면 행복을 선물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처음엔 2.5t 트럭을 팔았다. 다음엔 1t 트럭, 그 다음엔 봉고차를 헐값에 내놨다. 그럼에도 자금이 돌지 않았다. 껑충 뛰어오른 원재료 값도 골칫거리였다. 침구를 팔면 팔수록 손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야박해진 시장에 백기白旗를 들었다. 아들의 이름을 딴 회사였다. 그걸 포기했으니, 자책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침은 벌써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띵동!” 아내가 문을 열었다. 침구회사를 세우기 전 낡은 봉고차를 함께 타고 다니면서 이불을 팔았던 아내였다. 
그의 눈에 하얀 이슬이 맺혔다. 아내의 눈도 붉게 탔다. 1998년 1월 어느날, 부부는 까만 밤을 말없이 지새웠다. 새벽은 무심할 정도로 고요했다.  

#2장. 알사탕과 괴로움  

그날 이후 삶이 지루해졌다. 벼룩시장을 훑어보는 것 말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진흙구덩이에 빠진 인생에서 유일한 낙은 두 아이(1남 1녀)뿐이었다. 청년이 된 아들은 든든했다. 어여쁜 숙녀로 자란 맏딸은 “아빠 파이팅”이라면서 ‘알사탕’을 옷주머니에 넣어주곤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회사를 남에게 넘겼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순 없었다.  

이수열씨의 아내 박정순 여사도 ‘자원봉사상담가’다. 층간소음 갈등을 풀어주는 ‘이웃사랑 엽서쓰기’ 운동의 공동제안자이기도 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의 아내 박정순 여사도 ‘자원봉사상담가’다. 층간소음 갈등을 풀어주는 ‘이웃사랑 엽서쓰기’ 운동의 공동제안자이기도 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뭐라도 해야 했다. 서둘러 택시면허를 땄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는 건 정말 싫었다. 자존심 탓이 아니었다. 운전기사였던 30대 때 실명失明할 뻔했던 아찔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건 트라우마였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동네 택시회사(서울 도봉구)로 향했다. 벌써 열흘째였다. 상념에서 빠져나오면 언제나 그 택시회사 앞이었다.

“나 참, 또 여기네.” 
해가 언덕 너머로 졌다. 찬바람이 빈 가슴을 훑었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알사탕이 잡혔다. 괴로움이 씹혔다. 

#3장. 차가운 한마디  

그날도 그는 택시회사 앞에 서있었다. 열하루째였다. 부질없는 망설임이었지만 트라우마를 털어내는 건 쉽지 않았다.  늦은 오후.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타이어를 닦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 물었다. “세차만 하세요? 아님 택시도 모세요?”  

여성은 입을 열지 않았다. 타이어를 닦는 손을 바삐 움직일 뿐이었다. 다시 물었다. “주로 무얼 하시나요?” 그제야 여성은 뾰족한 말들을 쏟아냈다. “지금 IMF 아닌가요? 여기 사연 없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세요? 며칠째 거기서 서성거리는 건가요?”  

이수열씨는 “헌신하는 사람은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는 “헌신하는 사람은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표정 없는 그녀의 말은 엄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번잡했던 그의 마음이 순간 정돈됐다. 그래, IMF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견기업에 다니던 옆집 아저씨도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무역업을 하던 동네 통장도 부도를 피하지 못했다. “회사 괜찮느냐”가 그때의 인사였으니 사회도, 가정도 엉망이었다. 

그는 곧장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이력서를 택시회사에 냈고, “새벽 4시에 출근하세요”라는 답을 받았다. 막상 운전대를 잡기로 결심하니, 냉정한 현실이 밀려들었다. 트라우마는 고사하고, 사납금(당시는 일일 임차료) 4만원도 부담스러웠다.  

다음날 새벽 3시. 밤을 지새운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5만원이 잡혔다. “화장실 청소라도 하겠다”던 아내가 몰래 넣어둔 돈이었다. 사납금 따위에 위축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12시간. 그는 7만원을 아내 손에 건넸다. 땀에 흠뻑 젖은 그의 어깨가 떨렸다. 아내는 등을 돌려 붉어진 눈을 감췄다. 택시운전사, 시작이었다. 

이수열씨의 아내 박정순 여사는 어떤 고난에도 남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씨와 박 여사는 1977년 사내결혼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의 아내 박정순 여사는 어떤 고난에도 남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씨와 박 여사는 1977년 사내결혼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4장. 탐욕과 역설적 희생  

물은 낮은 곳을 채워 수평을 만든다.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도 같다. 가진 자들이 욕심을 조금씩 덜어내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물이 아니다. 가진 자는 더 갖길 원하고, 물욕은 부富와 빈貧을 쪼개놓는다.  

이렇게 탐욕스러운 세상을 외로이 떠받치는 게 있다. ‘역설적 희생’이다.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이가 더 못 가진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어릴 땐 흙으로 만든 집에서 살았다. 엄마의 고된 행상行商을 돕는 게 공부보다 늘 먼저였다. 동생들을 위해 학업을 일찌감치 접고, 낯선 서울행을 택했다. 

힘겹게 취업한 제과업체에선 궂은일을 도맡았다. 20대 청춘은 중랑천 판자촌에서 보냈다. 30대엔 낡은 봉고차를 몰고 방방곡곡 다니면서 이불을 팔았다.  

객고客苦 끝에 작은 침구회사를 일궜지만 IMF라는 국난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꺼렸던 ‘운전대’를 다시 잡은 건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세상에 너무 많은 빚을 졌다”면서 약자를 돕는 데 열정을 쏟았다.   

이수열씨는 누굴 만나든 예를 갖춘다. 그게 누군가를 돕는 자원봉사상담가의 자세라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는 누굴 만나든 예를 갖춘다. 그게 누군가를 돕는 자원봉사상담가의 자세라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사랑의 택시운전사 이수열씨. 그는 숨은 의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텃밭을 일궈 독거노인 100여명에게 과일·채소·김장 등을 선물한다. 다문화가정‧한가정 아이들에겐 학용품을 때때로 제공한다. 지자체(도봉구청)와 협업해 환경보호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주요 재원財源은 그가 택시운전을 하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이다. 20년 넘게 월 30여만원을 모아 후원금으로 활용했다. 대가나 응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서울 도봉구 ‘자원봉사캠프’의 캠프장을 15년째 맡고 있지만 단 한번도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  

그가 헌신하는 이유는 뭘까. “18살 때 제과업체에 들어갔어요. 어리고 연고도 없었지만 많은 분들이 신경을 써줬죠. 30대 시절엔 시력을 잃을 뻔했어요.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앞을 보지 못했을 거예요. 전 갚아야 할 게 많은 사람입니다.”  

그가 옛 기억을 읊었다. 지그시 감은 그의 눈에 30년 전 태안군(충남)의 버스정류장이 맺혔다. 몹시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소년이 보였다. 버스삯 500원을 손아귀에 꽉 쥔 18세 소년, 수열이었다. 

이수열씨는 20년째 월 30만여원을 후원금으로 내고 있다. 푼돈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집 안에 ‘모금함’을 만들어놨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는 20년째 월 30만여원을 후원금으로 내고 있다. 푼돈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집 안에 ‘모금함’을 만들어놨다. [사진=오상민 작가]

#5장. 엄마, 우리 엄마! 

아버지는 동네 훈장(태안군)이었다. 천성이 꼿꼿했다. 논도 밭도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훈육비를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다.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그 대가로 방 두칸짜리 흙담집을 만들어줬는데, 그게 수열이네였다.  

생계는 엄마의 몫이었다. 때만 되면 엄마는 과일·생선을 이고 이집저집 돌아다녔다. 때론 돈을, 때론 보리를 가져왔다. 장사가 시원치 않은 날엔 산을 하나 넘었다. 

그럴 때면 동네 친구 병식이네가 거점이었다. 산을 타기 전 엄마는 병식이 집에 보리·콩 등을 맡겼고, 수열이는 그걸 집까지 옮겨놓는 일을 했다.  

그렇게 18살이 됐다. 학교는 빠지는 날이 더 많았다. 생계가 급했다. 남의 논을 갈고 삯을 받지 않으면 삶을 꾸리기 힘들었다. 1969년 9월, 그날도 수열은 병식이네에서 보리를 옮겨다 놓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석양이 눈부셨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낭만 따윈 그에게 사치였다.  저 멀리 어깨에 봇짐을 멘 엄마가 보였다. 볼은 움푹 파였고, 입술은 메말라 있었다.

동네 훈장이었던 이수열씨의 부친은 가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는 행상을 하는 엄마의 몫이었다. 이 때문인지 아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엔 미안한 마음이 녹아들어 있다.[사진=오상민 작가]
동네 훈장이었던 이수열씨의 부친은 가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는 행상을 하는 엄마의 몫이었다. 이 때문인지 아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엔 미안한 마음이 녹아들어 있다.[사진=오상민 작가]

수열은 고개를 떨궜다. 암담한 현실 때문이었다. 참을 수 없었다. 끝내 분기憤氣를 터뜨렸다. “내일 서울 올라갈 거야. 제과업체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 거기서 돈 벌어올게요.”  

엄마는 답을 하지 않은 채 봇짐을 풀었다. 아들은 답을 듣지 않은 채 봇짐을 쌌다. 다음날 오전 8시. 수열은 집을 나섰다. 옷 한벌에 감자 2개, 짐은 단출했다. 

엄마는 벌써 행상을 나간 후였다. 언뜻 마루에 가지런히 놓인 돈이 보였다. 500원, 차비였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수열은 눈이 붓도록 울었다. 

# 6장. 아름다움은 봄처럼 짧았다 

친구 덕에 들어간 제과업체의 일은 녹록지 않았다. 가진 것 없는 그에게 맡겨진 일은 허드렛일이었다. 10시간 넘게 뜨거운 가마 옆에서 대기했다. 다 구워진 비스킷을 가마에서 꺼내는 게 그의 임무였다.  

정신없었다. 한눈을 팔면 탄내가 진동했다. 땀이라도 닦을라치면 재료와 포장지를 옮기라는 명령이 무섭게 떨어졌다. 일과가 끝난 다음 설탕가루가 박힌 생산라인과 바닥을 청소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퇴근 후에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중랑천 판자촌 6.6㎡(약 2평)의 집에서 동료 2명과 살을 맞대고 살았기 때문이다. 좁아서만이 아니었다. 더워서, 추워서, 비가 와서, 눈이 와서, 옆집 소리 때문에, 주변 소음 때문에…. 제대로 쉴 수 없는 이유들은 넘쳐났다.  

젊은 시절의 이수열씨. 그에게 가족은 희망이자 삶이다. [사진=이수열씨 제공]
젊은 시절의 이수열씨. 그에게 가족은 희망이자 삶이다. [사진=이수열씨 제공]

수열은 이를 악물었다. 월급 6000원, 적은 돈이 아니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면 그게 뭐든 참고, 땀을 쏟아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수열은 조금씩 신뢰를 받았다.

‘꼼꼼하다’며 일을 맡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처음엔 재고 관리, 다음엔 물류·유통을 담당했다. 입사 8년 만인 1977년 물류·유통을 책임지는 ‘포장반장’을 맡았으니, 말 그대로 고속승진이었다.  

그해 월급은 1만2000원으로 올랐다. 방 한칸짜리 사글셋집도 구했다. 사내에서 가장 예쁘다는 직원을 아내로 맞고, 토끼 같은 딸아이도 얻었다. 정녕 꿈 같은 날들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현실은 봄처럼 짧았다. 1982년 제과업계에 ‘자동화 바람’이 불자 모든 게 달라졌다. 공장에 식품영양학 전공자들이 넘쳐났다. 하얀 가운을 입고 공장을 들쑤시는 연구원도 숱했다. 신입사원을 애써 교육시켜 놓으면 그들에게 결재를 받는 일까지 생겼다.  

10년 넘는 경력은 가방끈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고약한 역설에 그는 치를 떨었고, 며칠 후 사표를 던졌다. 꿈은 사라지고 없었다.    

택시운전을 쉬는 날, 이수열씨는 동네 텃밭을 일굴 때가 많다. 지난해 이 텃밭에서 재배한 배추로 김장 500㎏을 담가 경로당 5곳, 소외가구 30곳에 보냈다. 봄이 오면 다시 새싹이 자라날 것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택시운전을 쉬는 날, 이수열씨는 동네 텃밭을 일굴 때가 많다. 지난해 이 텃밭에서 재배한 배추로 김장 500㎏을 담가 경로당 5곳, 소외가구 30곳에 보냈다. 봄이 오면 다시 새싹이 자라날 것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 7장. 젊은 의사의 전화  

“으악~” 짧은 비명, 수열이었다. 2.5t 트럭을 닦던 그의 눈에 끈적한 액이 튀었다. 찰나였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안약을 넣었지만 눈앞은 갈수록 하얗게 변했다.  

제과업체에 사표를 던진 뒤 힘겹게 얻은 일자리였다. 작은 카펫 생산업체의 운전기사직이었다. 사장님의 차를 주로 몰았지만 수금‧배송을 할 땐 트럭을 운전했다. 성실함은 여전했다. 다른 기사들이 화투를 치며 시간을 때울 때도 그는 차를 닦았다. 그날도 평소와 같았다. 

“2.5t 트럭의 엔진박스를 청소하고 있었어요. 순간적으로 배터리 연결선에서 기름 같은 액체가 눈으로 튀었죠. 이런 날벼락이 없었어요. ‘내가 뭘 잘못 했기에’라면서 한탄 또 한탄했죠.” 

30대 시절, 이수열씨는 왼쪽 눈을 잃을 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력을 되찾았을 때 자신이 잊고 살았던 ‘소중함’도 되찾았다. [사진=오상민 작가]
30대 시절, 이수열씨는 왼쪽 눈을 잃을 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력을 되찾았을 때 자신이 잊고 살았던 ‘소중함’도 되찾았다. [사진=오상민 작가]

술로 밤을 지새웠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수술비는 무려 1000만원. 사글셋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그에겐 턱없는 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장은 더 이상 수열을 찾지 않았다. 사실상 해고였다.  

절망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수술을 상담했던 젊은 의사였다. “제가 청주에서 안과를 개업합니다. 100만원에 수술을 해드리겠습니다. 사연이 안타까워서 연락드렸습니다.”  

수열은 깜짝 놀랐다. ‘눈만 보이게 해준다면 평생 보답하겠다’면서 애걸복걸했지만 정말 답을 줄진 몰랐다. 그땐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고쳐야 했다.  
  

1983년 봄, 수술은 성공했다. 희끄무레했던 눈앞이 선명해졌다. 그러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세상을 향해 불평을 쏟던 자신이 떠오른 탓이었다. 병상에 앉아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당연히 있었다.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세상은 기회를 줬다. 판잣집에 살 땐 이것저것 챙겨주는 동료들도 숱하게 많았다. 
세상은 지독했지만 한편으론 훈훈했다. 그가 그 소중한 걸 잊고 살았을 뿐이었다.

“시력을 되찾은 다음에 제가 뭘 잊고 살았는지 깨달았어요. 그래서 ‘갚으면서 살겠다’고 다짐했죠.” 가진 것은 별로 없어도 헌신하련다, 그래! 그는 역설적 희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수열씨와 아내 박정순 여사는 따뜻한 마음까지 닮았다. 두 사람의 자원봉사상담가 자격 명찰.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와 아내 박정순 여사는 따뜻한 마음까지 닮았다. 두 사람의 자원봉사상담가 자격 명찰.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가 캠프장으로 있는 서울 도봉구 자원봉사캠프는 지자체와 함께 환경캠페인을 진행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가 캠프장으로 있는 서울 도봉구 자원봉사캠프는 지자체와 함께 환경캠페인을 진행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8장. 낡은 봉고차의 기적  

눈 수술을 마친 1983년. 수열은 전재산 170만원을 탈탈 털어 중고 봉고차를 샀다. 고되더라도 ‘이불행상(도매)’을 해보기로 했다. 눈이 걱정됐기 때문인지 아내도 행상에 나섰다.  

고행苦行이었다. 봉고차에 이불을 싣고, 양평·홍천·원주 등지의 시장을 돌아다녔지만 문전 박대당하기 일쑤였다. 이불가게 사장들은 제아무리 색이 고와도 수열네가 떼온 이불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텃세가 심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거절하면 또 찾아가 인사했다. 한번이든 열번이든 스무번이든 똑같았다. 그러자 쌀쌀맞던 사장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1987년 이수열씨는 작은 침구회사를 세웠다. 맨손으로 일군 기적이었다. 사진은 박정순 여사가 이불을 꼬매고 있는 모습. 이씨 회사에서 만들었던 이불이 예스럽다. [사진=이수열씨 제공]
1987년 이수열씨는 작은 침구회사를 세웠다. 맨손으로 일군 기적이었다. 사진은 박정순 여사가 이불을 꼬매고 있는 모습. 이씨 회사에서 만들었던 이불이 예스럽다. [사진=이수열씨 제공]

그중엔 깐깐하기로 소문난 평택시장의 박 사장도 있었다.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 이불 상권까지 쥐락펴락하는 거상巨商이었다. 그런 박 사장이 어느 날 수열을 불러세웠다. 수열이 찾아가 인사한 지 100여일 만이었다.  

박 사장: “내가 인사도 안 받는데, 기분 안 나쁩니까. 몇달 동안 한결같이 인사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수열: “기분이요? 나쁠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지요. 저야 좋은 이불을 드리는 게 임무니까요.”  

박 사장: “이불 한번 가져와 보소. 오늘 거래 터봅시다.”

그게 물꼬였다. 1년 후, 수열이 납품하는 지역은 7곳으로 늘어났다. 거래처는 200곳을 넘어섰다. 쉼없이 발품을 판 결과였다.  

행상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987년엔 작은 침구공장도 세웠다. 가내수공업 수준의 공장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낡은 봉고차의 기적’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그럴수록 수열은 사회의 밑단을 살폈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사회복지시설을 남몰래 찾아가 돕기 시작했다. 버림받은 아이들에게도 진심을 보냈다. 

생계가 어려운 가정의 아이를 데려와 보육을 책임지기도 했다. 남이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헌신은 그림자 같은 삶이었다. 

이수열씨의 목표는 ‘사회적 약자를 평생 돕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는 경로당에 가면 유쾌한 사람이 된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의 목표는 ‘사회적 약자를 평생 돕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는 경로당에 가면 유쾌한 사람이 된다. [사진=오상민 작가]
서울 도봉구 자원봉사캠프에서 만드는 천연비누. 주로 독거노인·소외가구 등에 나눠준다. [사진=오상민 작가]
서울 도봉구 자원봉사캠프에서 만드는 천연비누. 주로 독거노인·소외가구 등에 나눠준다. [사진=오상민 작가]

#9장. 다신 흔들리지 않으리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흔히 방해되는 일이 많음
 

경상도 방언에 ‘눈천에 눈물낸다’는 말이 있다. 신나게 논 다음엔 반드시 울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인생사가 그렇다. 좋은 일에는 방해되는 일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1987년 이후 10년은 수열의 황금기였지만 세상의 빛깔은 언젠가부터 달라지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1997년)가 빚어낸 먹구름 때문이었다. IMF 전부터 징조가 좋진 않았다. 하지만 땀으로 만든 침구회사가 그렇게 빨리 무너질지는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충격이 컸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라는 자괴감이 가슴을 때렸다.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택시운전은 예상대로 벅찼다. 안하무인 취객을 만나면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사납금을 채우지 못한 날엔 좌절감에 허우적댔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헌신하겠다’는 다짐은 약해졌다. 고돼서, 손님이 없어서 등등…. 핑곗거리만 늘어났다. 

누군가를 평생 돕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수열씨가 하루를 시작할 때 그 약속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누군가를 평생 돕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수열씨가 하루를 시작할 때 그 약속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붙잡아준 건 어느 늙은 노숙자의 힘없는 한마디였다. 택시운전을 시작한 지 7개월여가 흐른 1998년 11월 새벽, 한기寒氣가 실린 바람이 매섭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강북 번동에 마지막 손님을 내려준 수열은 가까운 공중화장실에 들렀다. 신문지 한장만 덮은 늙은 노숙자가 버들버들 떨면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가수면假睡眠 상태였다.  

수열은 그 노숙자를 둘러업어 택시에 태운 뒤 경찰서에 내려드렸다. “1만원 드릴테니 식사하시고 담배도 한갑 사서 태우세요. 집에 가셔야죠.” 노숙자는 돌아서는 수열에게 조용히 말했다. “정말 고맙소만, 반겨주는 사람이 없다네.” 

못내 부끄러웠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평생 갚으며 살겠다’는 약속을 외면한 자신이 싫었다. 수열은 곧장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돈주머니’를 풀어 택시운전석 왼쪽에 매달았다. 푼돈이라도 모아서 약자를 돕겠다는 의지의 새김질이었다. 

다신 흔들려선 안 됐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다. 그렇게 또 10년, 그는 ‘사랑의 택시운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끝내 약속을 지켰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웃으며 손님을 맞는 건 이수열씨의 원칙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웃으며 손님을 맞는 건 이수열씨의 원칙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는 자원봉사캠프를 15년째 이끌고 있다. 그럼에도 단 한번도 명예를 탐한 적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는 자원봉사캠프를 15년째 이끌고 있다. 그럼에도 단 한번도 명예를 탐한 적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10장. 꽃에 물주는 나그네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 시인 도종환-  

택시운전사 이수열씨는 지난해 김장 500㎏을 경로당 5곳, 소외가구 30곳에 전달했다. 그가 캠프장을 맡고 있는 ‘자원봉사캠프(도봉구)’의 자원봉사상담가들과 함께 땀을 쏟은 결과였다. 배추·무·고춧가루는 이씨가 사비私備를 털어 마련했다. 

이씨와 자원봉사캠프가 일궈낸 성과는 또 있다. 도봉산 환경캠페인과 초중고 학생의 봉사활동을 ‘교육’으로 연결한 것이다. 봉사활동을 신청한 학생들이 도봉산을 청소하면서 연산군의 폭정과 비극을 배우는 식이다. 연산군묘는 도봉산 둘레길에 있다. 

2013년 그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웃사랑 엽서쓰기’는 여전히 층간소음 갈등을 풀어주는 솔루션으로 손꼽힌다. [※참고: 이 운동은 위층에 사는 초등학생이 손편지를 써서 아랫집 이웃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주관한 ‘2013 민간풀뿌리 자원봉사 프로그램 공모사업’에 선정되면서 시작됐다.

한 초등학생이 “쿵쿵 거려서 죄송해요”라는 내용의 엽서를 보내자 아랫집 할아버지가 “만나면 인사하자꾸나”라고 답장을 보내 화제를 모았다.] 

이수열씨가 기획한 ‘이웃사랑 엽서쓰기’ 운동은 층간소음 갈등을 풀어주는 솔루션으로 손꼽힌다. 어린이들에게 층간소음 방지책을 교육하는 이씨의 모습. [사진=오상민 작가]
이수열씨가 기획한 ‘이웃사랑 엽서쓰기’ 운동은 층간소음 갈등을 풀어주는 솔루션으로 손꼽힌다. 어린이들에게 층간소음 방지책을 교육하는 이씨의 모습. [사진=오상민 작가]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은 그가 택시를 몰면서 틈틈이 해낸 것들이다. 사람들이 그를 ‘사랑의 택시운전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과찬이다”면서 손사래를 치던 이씨는 시인 도종환(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읊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먼저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줘 보세요.”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잔잔하게 말을 붙여갔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꽃에도 물을 줘야 해요. 전 그 꽃에 물을 주고 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좌절하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꽃이니까요.”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2월 어느날 오후 1시. 그가 사뿐히 택시에 올라탔다. 언덕을 넘어 택시가 달렸다. 오랜만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 멀리 봄꽃이 고개를 들었다. 언뜻 우리네 같았다. 그래, 사람은 누구나 꽃이니까…. 사랑의 택시운전사가 환하게 웃었다.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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