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베트남이 될 수 있을까

30여년 전 베트남은 개혁개방 의지가 강했다. 북한은 어떨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불과 30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베트남 국민들은 얼굴 표정까지 달라졌다. 미국과 북한 2차 정상회담이 열린 베트남 하노이의 활기차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고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절감했다.

베트남전이 끝나고 미국과 수교(1995년)를 맺기 5년 전 1990년 하노이의 모습은 흡사 한국전쟁 직후 한국을 연상케 했다. 당 청사처럼 천장만 유난히 높은 호텔에 묵었는데, 바닥은 냉난방조차 되지 않는 초등학교 교실 같은 마루였고, 화장실엔 화장지 대신에 갱지가 놓여있었다. 식사는 달걀 프라이에 쌀국수가 고작이었다.

사람들 표정은 어둡고 거리는 온통 무채색이었다. 기부금 전달을 위해 찾은 극장에서 들리던 가냘픈 여성의 처연한 바이올린 연주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일행이 함께 식사하던 날 한 직원이 군용 더플백에 베트남 화폐(동)를 담아왔다. 화폐가치가 형편없어 생긴 일이었다.

베트남 통신시장은 정장호 금성정보통신(현 LG전자) 사장(78·현 시피마루 회장)이 앞장서서 개척했다.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한 중형 디지털 교환기(TDX)를 팔면서 통신장비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출길을 열었다. 당시 베트남은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COM)로 교환기와 같은 통신제품은 수출이 금지돼 있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기도 했지만 한국과 베트남간 통신협력은 끈끈한 인적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다져지게 된다.

1990년 정장호 사장과 국내 기술진은 베트남 주요 도시를 돌며 한국형 교환기 개통식을 하고 수출상담을 벌였다. 함께 출장길에 올랐던 필자는 안타깝게도 경제신문 1면 톱을 장식할 만한 큰 기사인데도 국익을 고려해 송고할 수 없었다. 낮에는 현지를 돌며 상담을 하고, 밤이면 직원들끼리 모여 다음날 대책회의를 했다. 코피까지 쏟으며 현지 업무를 지휘하던 정 사장이 촌음을 아끼느라 귀국 비행기 안에서 출장보고서를 쓰는 모습을 지켜봤다. 현재 1만여개 기업이 진출한 베트남 시장은 정장호 사장 같은 기업인의 헌신이 밑바탕이 됐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열의에 감명 받아 정식수교(1992년) 이전인데도 국내기업 진출의 문을 활짝 열어줬다.

과연 북한은 베트남이 될 수 있을까. 먼저 지도층의 유연성에서 차이가 난다. 29년 전 베트남 엘리트들은 가난을 극복하겠다는 신념과 개혁개방 의지가 대단했다. 당시 필자가 만났던 베트남 단 반 탄 장관은 소탈하고 겸손했다. 저녁 모임에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는데, 양말에 구멍이 난 게 보였다. 장관을 보좌하던 해외유학파 관료들은 사회주의 국가답지 않게 리버럴하고 애국심이 넘쳐났다.

이에 비해 북한은 오랜 세습독재로 관료사회가 윗사람 눈치만 볼 정도로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 주체통치는 무오류이고, 권력 비판은 신성불가침과 같다.

베트남은 공존과 화해의 나라다. 전쟁을 치렀던 미국과 손잡았고, 한국의 참전에 대해서도 뒷말이 없다. 호찌민(독립과 건국의 아버지)과 쩐흥다오(몽골군 침략 세번 물리친 장군)가 21세기를 사는 베트남 민족의 정신세계를 이끈다면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현 시대의 공간을 함께 나눈다. 자동차는 오토바이를 밀어내지 않고, 오토바이는 자동차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며 곡예사처럼 교통흐름을 탄다.

하지만 북한은 오랜 통제사회 속에 공존보다는 ‘너 죽고 나 살기’식 극심한 숙청이 일상화된 3대 세습의 독재국가다. ‘핵’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경제’라는 과실을 얻을 수 있는데 둘 다 가지려 욕심을 부린다.

북한 개혁개방엔 남쪽 기업인의 참여가 절실하다. 그러나 북한은 ‘투자’와 ‘헌금’을 혼동하는 것 같다. 지난해 이선권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위원장은 평양을 방문한 한국 기업인에게 “아니, 지금 냉면이 목구멍에 넘어갑니까”라고 타박했다. 농담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행여 남한 기업인을 ‘돈 내는 기계’로 생각한 건 아닐까.

지금의 북한은 전 세계 최빈국 중 하나라는 점에서 1986년 ‘도이머이’ 직전의 베트남과 닮았다. 그러나 사실상 핵보유국이고, 3대째 내려오는 ‘백두혈통’이라는 김씨 절대왕조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베트남과 완전히 다르다. 중국이라는 뒷배경도 변수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개혁 개방으로 나가야 제2, 제3의 정장호 같은 기업인이 북한에 달려가 그들과 손잡고 한민족의 경제번영을 일궈낼 텐데 그 바람이 이뤄질까 싶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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