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ovie] ‘자기 합리화’라는 역병
[Economovie] ‘자기 합리화’라는 역병
  • 김상회 정치학 박사
  • 호수 328
  • 승인 2019.03.07 1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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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라쇼몽羅生門❸

일본 헤이안 시대, 전염병과 대기근이 닥친 수도 교토에는 굶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처리하다 못해 아무 데나 버리게 되고 도시 외곽문인 라쇼몽의 다락은 시체 유기 명소가 된다. ‘비단결 같은 삶’을 갈구하는 ‘라쇼몽羅生門’이라는 이름이 역설적이다 못해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모두 진정한 반성은 보이지 않고 오직 처벌을 조금이라도 덜 받기 위한 자기 합리화의 이유만 무성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화 ‘라쇼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두 단편소설 「라쇼몽羅生門」과 「덤불 속藪の中」이 원작이다. ‘덤불 속’이 사실상 영화 스토리의 중심이다. 반면 같은 제목의 소설 라쇼몽은 영화의 스토리와 큰 연관은 없다. 그러나 라쇼몽은 덤불 숲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배경 역할을 한다.

라쇼몽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수도였던 교토의 외곽문이다. 수년간의 대기근, 화재, 그리고 전염병 등으로 죽은 사람들이 넘쳐나자 라쇼몽의 다락은 시체를 유기하는 장소가 돼 버린다. 영화 속 라쇼몽에는 다락의 시체들 사이에서 버려진 강보에 싸인 아기가 나온다. 그 아기를 거두겠노라 안고 가는 사내를 두고 사람들은 그 사내가 아기를 삶아 먹기 위해 ‘가져간다’고 의심한다. 이쯤 되면 라쇼몽이 아니라 지옥문이라는 현판이 어울릴 듯하다.

라쇼몽羅生門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수도였던 교토의 외곽문을 의미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거리마다 버려진 시체들이 썩어가는 흉흉한 헤이안의 어느 비 내리는 저녁, 인적 없는 라쇼몽의 허물어져 가는 처마 아래 칼을 찬 사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는 대기근 때문에 형편이 어려워진 주인에게 해고를 당한 하인으로, 앞으로 꾸려나갈 생계가 막막하다.

퇴직금이나 실업수당이 있을 리 없는 시절의 해고는 곧 죽음이다. 자신이 도둑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도적에 입문할 결심도 못하고 그저 답답할 뿐이다. 사내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 세찬 비라도 피할 생각으로 라쇼몽 다락으로 올라간다.

다락에 올라간 사내는 한 노파가 여자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 엽기적인 광경을 목격하고 경악한다. 분노와 호기심이 뒤범벅된 사내가 노파를 붙잡고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이유를 추궁한다. 노파는 여자 시체의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들어서 팔려 했다고 대답한다.

노파도 자신이 하는 짓거리가 사람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만행’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러나 나름의 ‘자기 합리화’가 이어진다. 자기가 머리카락을 뽑고 있던 여자는 말린 뱀을 토막 내 그것을 말린 물고기라고 속여 팔며 연명하던 여자라고 고발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아가기 어려운 ‘난세’를 감안해 자신은 그 여자가 하는 짓거리를 탓한 적이 없으니 이 여자도 자기를 탓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묘한 논리를 펼친다.

그 말을 듣던 남자가 말한다. “나도 당신 옷이라도 빼앗아 팔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이니 당신의 옷을 벗겨가도 할 말 없겠지?” 그렇게 사내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노파의 옷을 벗겨 들고 사라진다.

‘자기 합리화’가 역병처럼 번진다. 서로가 ‘난세의 어려움’과 ‘남들도 다 하니까’를 핑계로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고 합리화한다. 과속으로 단속에 걸리면 ‘바빠서 어쩔 수 없었다’거나 ‘앞차들도 다 과속하던데 왜 나만 잡냐’고 항의하는 꼴이다.

각종 사건의 당사자들이 반성 없이 자기 합리화의 이유만 쏟아내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국제적인 무기밀매상을 다룬 영화 ‘로드 오브 워(Lord of War)’에는 자기 합리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사가 나온다. 무기밀매상은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펼친다. “자동차 사고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지 알아? 사람들이 자동차를 팔지 않으면 나도 무기 안 팔아! 그나마 내가 파는 총에는 안전장치라도 있지….” 마약상들은 ‘내가 마약을 안 팔아도 마약 팔 놈들은 널려 있다’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정신분석학의 시조라 할 만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한 이후에 초자아(superego)에 의해 발생하는 죄책감이나 불안을 억누르거나 떨쳐버리기 위하여 자아(ego)가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것을 자기 합리화라고 정의한다.

라쇼몽의 무대인 헤이안 시대처럼 난세인지 시체의 머리털을 뽑아 가발을 만들어 파는 만큼이나 엽기적인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단돈 만원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부모를 죽여줄 살인청부업자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의붓딸을 강간하기도 하며, 중학생이 초등학생을 강간한다.

그런데 모두 진정한 반성은 보이지 않고 오직 처벌을 조금이라도 덜 받기 위한 자기 합리화의 이유만 무성하다. 자기 합리화가 역병처럼 덮쳐 좀처럼 물러갈 기미가 안 보인다. 이쯤이면 역병이 아니라 토착병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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